1949년 이대 서양화과를 졸업할 때 우리 7명은 5년마다 발표회를 갖기로 다짐하고 그해 10월에 충무로 대원화랑에서 첫 7인전을 열게 되었다. 심형구 과장님은 매우 기뻐하시며 우리들 모임의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이대의 색이 초록색이니 녹미회(錄美會)라 부르라 했다. 그 자리에서 초대회장에 최영준이 추대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동창미술단체가 생겼는데 시작은 겨우 7명의 서양화과 1회 졸업생들이었다.
다음해 6월25일 새벽 느닷없이 김일성 군대가 쳐들어왔다. 피난생활이 시작되고 3년이나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는 사이 대한민국은 쑥밭이 되었으나 아직도 6.25는 끝난 전쟁이 아니다. 휴전이 된 후 녹미회는 서양화 뿐 아니라 동양화, 자수, 도안, 조각 등 모든 졸업생들이 참가하게 되었고 해마다 후배들이 자동적으로 들어오게 되니 큰 단체가 되어 있었다.
1956년 그동안 남편의 임지를 따라 이곳저곳 흘러다니던 나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친구들은 반가워하며 나에게 제3대 녹미회장의 굴레를 씌워주었다. 내키지 않았으나 “그새 놀고만 먹었으니 일 좀 하라”고 야단들이니 어쩌겠는가?
그런데 이재순이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그녀는 나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가 못하는 일을 척척 해내고, 서슴없이 선배화가들을 찾아다니며 배워서 더 좋은 그림을 내놓곤 하는 그녀가 부러웠었는데 이럴 때 재순이가 왜 보이질 않을까? 개성고녀 미술교사였던 이재순이 인민군에게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는 소식은 나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여고교사이고 인테리 반동분자라는 이유였다 하니 나는 기가 막혔다. 만약 악마들 손에 무참히 가지 않았다면 이재순이야말로 대한민국 여류 미술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녹미회의 자랑스런 선배가 되었을터인데…
제3대 녹미회장을 맡은 나는 한마디로 혼이 났다. 전시회를 하려고 엽서 50매를 사서 한 장 한 장 주소 성명을 쓰고는 모이자고 했더니 당일에 나타난 회원은 10명에 불과했다. 팔이 아프도록 엽서를 쓰고 겨우 열명을 건지다니… 그래도 나는 그 일을 계속하였다. 내가 엽서 살 돈이 아직 있으니 해보는거다. 암 해야지!
파리에서 돌아온 수화 김환기 선생님이 나에게 충고를 해주셨다. “전시회 때 회장 이름으로 초대장을 인쇄하여 미리미리 각 보도기관을 돌며 인사를 하라”고.
나는 내 이름으로 인사장을 만들었다. 우선 남편의 고교 동창이 편집부에 있다는 말을 듣고 한국일보로 갔다. 김규동 시인이다. 한국일보사 구 사옥 낡은 2층 계단을 장기영 사장님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그 육중한 몸을 움직이시며 내려오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가 청진에서 왔다니까 그렇게 반가워하셨다.
대한공론사의 김봉기 사장님은 나의 본관을 물으시더니 고모님이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나온 계산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신문사를 돌아다니며 많은 기자들과 친구처럼 지내게 된 것도 좋은 추억의 하나이다. 내 방문을 빼꼼이 열고 배시시 웃으며 “선생님 기사꺼리 주세요”하던 이는 이제는 감히 가까이 갈 수도 없게 된 저 장명수씨, 경향신문의 이구열 기자는 미술평론가로 대학자이다. 김후란 시인은 전화로 ‘컷’을 그려달라고 주문하시고는 달려와서 받아가곤 했는데 요즘 같아선 어림도 없는 얘기가 아닌가. 서울신문의 김재희씨는 하와이에 취재를 와서 길옥윤씨를 인터뷰하는데 우리집 헌 밥상에 마주 앉아 별의별 말을 다 물어보고 있었다. 패티 김이 ‘이별’을 부르고 있을 때였다. 조경희 선생 얘기도 해야겠다. 내 곁에서 커피잔을 들여다보시더니 “건강에 나빠요”하시며 가루우유를 쏟아 부어 흰 죽사발을 만들어주셨던 조선생도 이제는 가셨다고… 내가 블랙 커피만 마시던 때 얘기이다. 녹미회는 후에 하도 커져서 함께 발표할 공간도 문제가 되고 분야별로 생각들도 달라 의논한 끝에 이서회(梨西會)라는 이름으로 서양화만의 단체가 되었다 한다. 1949년 7명이 시작하던 때로 되돌아간 셈이다.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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