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 석양을 받으며 작은 시골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휘어진 산허리를 돌아 작은 어촌에 다다를 때쯤 이미 어둠은 화선지의 먹물처럼 젖어들어 풍경은 천지분간이 안되었다. 낯선 거리에서 길을 잃어 막막해진 난 소실점 속으로 사라지는 길들을 따라 이리저리 헤매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예약해 놓은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예약할 때 웹사이트를 통해 거듭 확인한 사진과는 다르게 여관은 폐허처럼 적막하고 스산스러웠으나 교토에서 출발하여 여러 번 기차를 바꿔 타고 길을 찾느라 헤맨 후의 안도감 때문인지 썰렁한 방마저 아늑하고 따뜻했다.
‘일본에 가거든 꼭 나오시마 섬을 보고와요’ 당부한 친구의 말에 무조건 길을 나선 난 지금 일본땅 끝자락에 있다는 그 섬을 찾아가고 있는 길이다. 그리고 하룻밤 잠시 머무는 이 작은 어촌은 내일 나오시마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한 선착장이 있는 우노이다. 어둡고 불안한 기운에 잠을 설친 후 푸르스름한 새벽녘 짐을 싸들고 나선 거리는 버려진 폐선과 고철더미들이 수북이 쌓여 있고 바람이 불면 누런 흙먼지라도 몰려올 듯했는데 해무는 어디서 그렇게 몰려오는지 숙소에서 5분 거리에 있다는 선착장을 찾아 20분 넘게 헤맸다.
그러나 앞을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바다 안개 속에서 난 진부하고, 수다스럽고, 좁았던 평상시의 나를 잠시 내려놓고 모르는 언어와 얼굴들 사이에서 혼자가 되어 그저 낯선 장소가 내 옷소매를 잡아끄는 대로 이리저리 헤매며 나오시마섬으로 가고 있다. 안개 속에서 노란 호박 하나가 허공으로 둥실 떠오른다. 야요이 쿠사마의 그 유명한 설치작업 ‘호박’(사진)이다. 섬에 다 왔나보다 싶어 뱃머리 쪽을 보니 눈앞에 거짓말처럼 나오시마의 팻말이 보인다. ‘예술의 섬 나오시마’ 사람들은 이곳을 그렇게 부른다.
일본 가가와현 해안에 자리 잡은 작은 섬 나오시마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구리제련소가 있던 그저 그런 외딴 섬이었다 한다. 쇠붙이를 만들고 정제하는 과정에서 뿜어내는 각종 폐기물로 섬 전체가 황폐해진 이곳이 ‘나오시마 프로젝트’ 통해 하나의 아트사이트(Art Site)가 되어 산업 폐기물 대신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들을 이정표 삼아 섬 전체를 산책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배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농협 앞을 지나 마을 끝자락 오르막에 다다르자 아침햇살을 받으며 빛과 물과 바람의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베네스하우스가 갑작스럽게 바다의 표면 위를 뚫고 나오듯 서있다. 내가 묶을 숙소이며 동시에 뮤지엄이다. 방에서 빈둥거리다 기분이 나면 산책 나가듯 같은 건물에 위치한 뮤지엄으로 내려가 탁월한 예술가들인 앤디 워홀, 잭슨 폴락. 데이빗 호크니 등의 작품들 사이에서 실컷 노닐다 좁은 계단 아래 몰래 숨어 있는 월터 드 마리아의 작품도 찾아보고(제목도 seen unseen이다) 바스키야의 작품이 걸린 테라스에서 커피도 마시고 바닷가 모래사장에 우뚝 서있는 조지 리키의 설치작업도 보고 늦은 밤 모두가 잠든 텅 빈 뮤지엄에서 언어를 작품으로 바꾼 부르스 나우먼의 작품 ‘100 lives or die’의 네온으로 써진 단어들이 하나씩 점등되었다 소멸하는 것을 혼자 대면하고 앉아 언제까지라도 바라볼 수 있다니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나는 설레는 기대감을 갖고 간 그곳에서 그렇게 며칠을 영원처럼 느긋하고 게으르게 취해 있었다.
이제 슬며시 일상으로 돌아온 지 한달 째, 떠나오던 날 선착장에서 섭섭함 같은 애달픈 빛깔로 석양에 물들어 있던 쿠사마의 호박을 나는 지금도 가끔 그리워한다. 그리고 여행을 준비하는 지인들에게 옷소매라도 잡아끌듯 당부한다. ‘혹시 일본에 가거든 꼭 나오시마 섬을 보고와요’ 라고.
<앤드류샤이어 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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