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넘어 산 평생에 두 번째로 노래방에 갔다. 흰 옷을 즐겨 입고 가무를 좋아한다는 그 한민족의 후예답지 않게 말이다. 중학교 때부터 한 성가대 경력이 40년은 되니, 노래 실력이 그리 젬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알던 이들 앞에서 정색을 하고 노래 부르는 게 쑥스럽기 때문이다. 글 쓰는 이들도 행사 후엔 2차로 노래방에 가기도 하지만 한 번도 따라간 적이 없었다. 후일담을 들어보면 끼가 많은 이들이 글도 쓰고 노래도 잘하고, 어떤 이들은 노래방 탁자에 올라가 ‘쇼’도 한다나? 그랬어도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두 달에 한번 모이는 여고 동기 모임이 11월 아니면 1월이어서 이른 연말파티를 하기로 하였다. 11월에 송년회라니 어색하여도 착하게 크리스마스 스웨터를 챙겨 입고 나온 친구도 있어 얼추 연말 분위기를 내었다. 새로 맡은 동기회장이 여고시절 합창지휘를 하던 인물인지라 노래방으로 모임 장소를 정하여도 군소리가 없었다. 아니 나는 조금 심기가 불편한데 다들 좋아하는 눈치이기는 했다.
12명의 동기들이 대낮에 모였다. 토요일 한낮의 노래방은 한산하였다. 음식물 반입은 안 된다고 벽에 주의사항이 붙어 있건만, 군인보다 무섭다는 아줌마 부대가 바리바리 음식을 싸들고 가 방을 점령하여도 꽃미남 종업원은 아무 말 못했다.
빼거나 사리지도 않고 일사천리로 자기 노래를 입력하기 바쁘다. 마치 이 날을 고대한 사람들 마냥. 목사님 사모님도 찬송가에 지친 목청을 구성진 유행가로 달래고, 근엄한 학교 교장은 학부형인 젊은 엄마들에게 배웠다며 유행 발라드를 부른다. 환자를 보느라 전혀 자기시간이 없다는 의사도 말만 엄살이지 그야말로 가무를 선보였다. 언제 적 김추자인가 싶었다. 김수희와 심수봉이 주현미가 엘에이에서 다시 태어난 듯 뜨거운 열기가 저녁까지 이어졌다.
노래가 끝나면 점수와 함께 코멘트도 따라 나온다. “노래방에서 돈 좀 쓰셨네요” 또는 “노래방 내공이 보통이 아니시네요” 등으로 모두들 좋은 의견을 받는다. 그 한 마디 기계음에 귀를 기울이며 환호하는 모습이라니 순진함에 웃음이 나왔다.
노래방 경험이 없는 나는 끝까지 아는 노래도 실은 없어서 망설였다. 자기들만 부르기 미안한지 강력히 권하기에, 남이 부를 때 엉터리 랩으로 베이스를 넣었다. 뜻밖에 점수가 100점이 나오고 “가수로 데뷔하세요”하며 팡파레가 울린다.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꼴이다. ‘총 맞은 것처럼’을 비 맞고 정신 줄 놓은 여자처럼 중얼거리면 100점이 나온다는 노래방 팁을 건졌다.
첫 사랑과 불렀다는 옛 청춘의 노래도 나오고, 이민 짐에 싸온 카셋 테입을 마르고 닳도록 듣고 익혔다는 슬픈 노래도 나온다. 나이 먹으니 트로트가 가슴을 울린다는 레퍼터리의 역사는 인생길의 사연이기도 하였다. 조금 젊었더라면 핑계대고 나와 버렸을 분위기가 이젠 오히려 편안했다. 부인 못할 아줌마 세대인 것이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다보니 우리 모두 핏대 올릴 만큼 스트레스가 많은 삶을 사는가 하여 마음이 찡하였다. 그 모습들에 공연히 눈물도 찔끔 나는 것이 동병상련인가 싶었다.
얘들아 우리 참 치열하게 살았구나. 이젠 쉬엄쉬엄 가자. 1월엔 찜질방이라고? 늙으면 정동 일번지의 콧대는 간 곳 없고, 그저 같은 양로원 출신으로만 보인다는 선배의 조크가 와 닿는 세모의 시간이다. 대개 빠름은 더 많은 소유를 추구하고 느림은 더 많은 내려놓음을 가져온다더라.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도 어느덧 오후 되었으니…
이정아 <재미수필문학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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