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이 탐스럽게 내리고 있다. 온천지는 흰 눈에 덮이고 주위에 늘어선 우중충한 푸른 솔나무 가지위에 탐스러운 눈꽃을 아름답게 펼쳐내고 있다. 창밖 환하게 밝히는 가로등 아래로 포근히 내리는 첫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첫 아이를 낳던 39년 전 그날의 추억 속으로 빠져드는 늦은 밤이다.
첫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9시간의 긴 산고를 겪고 첫딸을 낳았다. 더욱이 첫아기를 남편 부재(不在)중에 낳는 외롭고 쓸쓸한 산모였다. ‘으아앙’ 울어대는 갓난아이는 어쩜 그리도 남편을 꼭 빼다 닮았는지 곱슬머리까지 붕어빵이다.
시아버님께서 주신 ‘선미’ 수정’ 두개의 이름 중 티 없이 맑고 예쁜 ‘수정’ 이름을 택했다. 그 후 새댁이 아닌 수정엄마로 호칭이 바뀌고. 한 달간 정성껏 해산 간을 해주신 시어머님.
지금같이 실내에서 세탁기가 빨아주는 시대가 아닌 꽁꽁 얼어붙는 수돗가에서 기저귀 빨래, 미역국을 하루에 다섯 끼를 챙겨주시고, 고약하게도 낮밤을 바꿔 밤이면 울어대는 첫 손녀를 품에 앉고 며느리에게 충분한 잠을 주시느라 애쓰셨던 분.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 나뭇가지마다 매달린 수정 같은 얼음꽃들을 활짝 피워놓았던 겨울 한복판에서 고생하신 정 많은 시어머님의 사랑을 잊지 못한다.
1974년 정월 미국에서 둘째 아이를 낳던 날 새벽, 산기 있는 아내를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남편은 출근했다. 난 하루 종일 산고를 치루고 둘째 딸을 낳았다. 두 번째는 틀림없이 아들이라 기대했었는데 딸을 낳고 속상해 말 못하고 남편 앞에서 울어버렸던 나!
누구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고 아침이면 직장에 나간 남편은 저녁에야 퇴근해 집에 오고 혼자 미역국을 끓이며 이민초기 산모의 서글픔을 누가 알기나 했을까? 첫아이는 남편 외국출장 중에 낳느라 서러웠고 둘째 아이는 타국에서 고국의 부모형제가 그리워 꽈리 눈이 되도록 울던 그 시절도 이제는 다 옛이야기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성장한 딸들이 결혼하고 줄줄이 아이 낳기 경쟁(?)이라도 벌이듯 엄청 엄마를 조바심치게 하고 연년생으로 태어난 여덟 손주들 중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에 태어난 아이들이 많은걸 보면, 굴을 파고야 이웃왕래가 가능했다는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난 날 할아버지가 지어준 설(雪)자 내 이름 탓(?)인가 유난히 우리가족은 눈(雪)하고는 인연이 깊은가보다.
한 겨울 눈 쌓인 날 딸들 산후 도우미로 동분서주하며 미끄러운 길을 운전해갔다. 멀리 있는 딸에게는 비행기로 날아가 미역국을 끓이며 요리사 주방장으로, 또 밤새 울어대는 손주를 안고 딸 밤잠을 설칠까봐 이방저방으로 피난 다니느라 허리가 휘는 줄도 몰랐다. 한동안 목 디스크(?)가 생겨 움직이기가 힘들어 쩔쩔매던 그 시간들도 이제는 흐르는 세월 속에서 졸업을 했다.
또 나도 할머니가 되어 어머님의 전철을 밟고 보니 특별히 지난날 엄동설한 추위를 마다않고 헌신적으로 베풀어주셨던 고인이 되신 어머님의 사랑이 한없는 그리움으로 남는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불현듯 떠오른 꽃다운 시절의 일상을 그리며 지나쳐간 나의 삶의 여정이 모두가 아름다운 흑백사진첩의 추억 속에서 미소 지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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