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되고 이익 없는 일로 수고만 한 듯한 날들도 많았던 지난해의 호된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한해의 시작에 서면 희망을 다시 감각하며 새로운 가능성으로 향해 주문을 걸게 된다.
넘치는 풍요로움까지는 아니더라도 주말에는 아무런 근심 없이 소파에 몸을 펴고 누워 유유자적 할 수 있는 의, 식, 주의 안정, 가족의 단란 등 가까운 지인들이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사실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 큰 부자가 아닌 소시민의 안정된 삶이며, 또한 그것에 도달하거나 유지하기가 얼마나 만만치 않은지를 서로 토로할 때가 많다.
그저 큰 욕심 없이 안정되게 살고 싶다 하는 기준점인 중산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사회과학적으로 명확한 조건이 제시된 바 없기 때문에 측정하는 척도 또한 모호하긴 하나 힘든 생활고와 궁핍함으로 생활이 옥죄지 않고, 적당히 가질 것은 가지고 사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1970년대 당시 문화 대통령으로 불렸던 프랑스의 퐁피두 대통령은 이른바 ‘카르테 드비’(생활의 질)를 통해 간결하고 실천적인 삶의 조건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었는데 그가 제시한 중산층이 되기 위해서는 재산, 수입 등 물질적 소유뿐 아니라,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하나 있을 것, 공분을 일으키는 사회문제에 의연히 참여할 것, 자기 집안만의 음식 솜씨 하나를 지닐 것 등 외에도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기 위해 외국어 하나쯤은 구사할 수 있어야 하고, 예술에 좀 더 공감하고 정서적인 여유를 갖기 위하여 악기 하나 정도는 다뤄야 한다는 등 정신적 문화적 보유 정도에 무게를 싣고 있으니, 돈이 많고 적음을 떠나 생활의 질적 향상을 강조한 프랑스식 중산층 조건인 셈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이전 우리나라에도 이에 못지않은 참으로 격이 있는 주장이 있었는데 사대부의 청빈철학이 지배했던 조선조 중기, 중종 때 학자 김정국은 재산 모으기에만 몰두해 있는 벗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 풍요로운 삶의 태도를 권유하였다 한다.
“20여년 동안 어렵사리 노력하여 이제 겨우 두어 칸 집에 두어 이랑 전답을 갖고, 겨울 솜옷과 여름 베옷 각 두어 벌 있으나, 눕고서도 남는 땅이 있고, 신변에는 여벌 옷이 있으며, 주발 밑바닥에 남는 밥이 있소. 여기에 없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서적 한 시렁-거문고 한 벌-햇볕 쪼일 마루 하나-차 달일 화로 하나-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하나-봄 경치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면 족할 것이오. 그러면서 의리를 지키고 도의를 어기지 않으며, 나라의 어려운 일에 바른 말 하고 사는 것이 그 얼마나 떳떳하오’라고 하며 넉넉한 삶이 되기 위한 충분한 소유의 조건, 문화의 조건, 정신적 조건을 말하였다 하니 20세기 퐁피두 대통령이나 16세기 조선시대 김정국 모두 삶의 질은 삶의 태도로 판단되어져야 한다는 것에 일치하고 있다.
정신과 물질의 풍요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은가를 판단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는 청빈이 최고의 미덕이 아닌 소비와 소유가 미덕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왜 잘 살아야 되는지 모른 채 잘 살아보자고 질주하는 우리들의 오늘은 후일 물질적 중산층을 넘어 상류층이 된다 한들 그 헛헛한 포만감에 망연자실 할지도 모를 일이다.
새로운 다짐과 함께 2010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주위를 조금 살펴보면 무료로 개방되는 뮤지엄, 무료 음악회, 무료 전시회, 문학 모임 등 주머니 사정과 상관없이 우리를 여유 있는 정신적 중산층으로 만들어줄 행사들이 늘 열려 우리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으니 새해의 결심목록에 ‘전시장이나 공연관람 하기’를 더해 한 달에 한번쯤은 느긋한 호사취미를 누려보면 어떨까?
“돈이나 지위나 권위를 더 가지려는 소유욕구(to have)는 기본적인 생명유지를 하는 선에서 그치고, 보다 인생을 즐기고 보람과 뜻을 추구하는 존재욕구(to be)를 추구해야 한다”
-에리히 프롬
<앤드류샤이어 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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