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는 어둠속을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벽을 더듬으며 들어간 전시실은 처음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다가 20분쯤 지나자 어렴풋이 벽 아래서 빛이 스며 나오며 커다란 사각형 하나가 허공으로 떠오른다. 벽의 틈새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흔들거리는 문이 되고, 벽 모서리에 비춰진 빛은 원색의 옷이 입혀지면서 삼각, 사각형의 기하학적 형상이 된다. 어둠이 눈에 익어지자 손을 뻗어 사각형 면을 향해 다가가 보지만 표면에 손이 닿는 대신 허공으로 쑥 빠지게 되니 깊이를 가늠키 어려운 그 공간은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열려있는 창이다.
‘미니멀리즘의 사제’로 불리는 빛의 작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작품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일본의 작은 섬 나오시마의 옛 주택을 과학과 현대미술이 어우러진 체험공간으로 개조했다는 전시장의 입장객수는 한번에 30명 미만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줄을 섰으나 내 차례가 온 시간은 오후 3시30분. 입장시간이 적힌 티켓을 산 후 가까운 책방에서 작가에 대한 간단한 안내책자를 읽으며 긴 시간을 때운 후에야 겨우 입장, 빛을 창조적 매체로 다룬다는 그의 작품을 처음 ‘체험’ 하였다. 다음 작품은 전시장을 옮겨 지중 뮤지엄에 설치된 ‘sky space’, 변화되는 하늘의 모습을 간결한 구도의 마름모꼴 천장 속에 넣은 작품이다
시간에 따라 느리게 변화하는 작품 속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 빛이 쏟아져 내리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만화경 같은 빛의 유희를 느꼈던 그 아련한 정오가, 어느 늦가을 오후 붉은 명주실처럼 낭창거리던 석양빛이 마치 주문이라도 외운 듯 부유하는 기억 속에서 둥실 떠오른다
제임스 터렐, 아직 우리에겐 낯설지만 1960년대 후반 어두운 공간의 벽 모서리에 빛을 비춰 기하학적인 형상을 보여주는 투사작업을 시작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후. 사람들이 빛을 느끼는 방식과 효과를 이용한 뛰어난 작품들을 40년 넘게 선보이고 있는 새로운 예술의 대표적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비행기 조종사였던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아 항공술과 천문학에도 능하다는 그는 비행을 통해 공간 감각, 하늘의 빛깔, 쏟아지는 햇빛, 기상조건 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그의 전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빛에 대한 인식의 바탕이 되었다 한다.
예술의 역사는 항상 빛과 연관되어 있다. 같은 흰색이라도 빛에 따라 다른 색으로 표현했던 베르메르, 어둠과 대립하기보다는 화면에서 서로 잦아들며 빛의 정신적인 느낌을 담았던 렘브란트, 색은 빛과 어둠이 경합하면서 발현된다고 믿었던 터너, 그리고 빛과 함께 변하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를 그려내려 했던 모든 인상파 화가들…
빛을 통해 우리의 존재를 비추게 하겠다는 제임스 터렐 역시 선배 예술가들의 빛에 대한 관심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으나. 다만 물감으로 빛을 그리던 옛 화가들과는 달리 빛을 창조적 매체로 다루고 있는 것이 다르다 할까?
1977년 미국 애리조나에 있는 로덴 분화구(Roden Crater)를 구입한 그는 현재 그곳에 머물며 기념비적인 대지미술 프로젝트을 진행 중이다. 뉴욕 구겐하임 회고전 이후인 2012년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라 하니 빛과 공간의 예술을 애리조나 사막 한가운데서 체험할 수 있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내 작업은 공간과 그 공간에 머무는 빛에 관한 것이다. 당신이 그 공간을 어떻게 대면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에 관한 작업이다.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면서 말없이 생각에 잠기는 것처럼 그저 보는 것(seeing) 그 자체에 대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스 터렐
메이 정 / 앤드류샤이어 갤러리 관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