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는 2010년 동계 올림픽 출전이죠”
4년 전 한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내보인 포부였다. 타고난 재능과 깜찍한 미소, 우아한 동작으로 1990년대 피겨 계의 떠오르는 별로 주목받았던 선수, 남나리였다.
밴쿠버 올림픽 대회장을 누비는 김연아의 행보가 눈부시다. 세계가 김연아의 몸짓 하나하나에 주목하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20년 전만해도 피겨스케이팅은 서구인들의 독점 종목이었다. 하얀 피부, 노랑머리, 파란 눈의 백인 소녀들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현란하게 은반을 누비는 광경은, 그들의 국력만큼이나 우리에게는 멀고 먼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 선망의 종목에서 한국 선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는 것은 10년 전만해도 상상이 어려운 일이다. 23일 김연아의 쇼트프로그램 경기를 지켜보며 한인들은 새삼 뿌듯한 감격을 맛보았다.
그 중에는 감회가 남달랐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제2의 김연아’를 꿈꾸며 수없이 엉덩방아를 찧고 있는 ‘김연아 키드’들은 “나도 언젠가는 …”하며 결의를 다졌을 것이고, 그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특기생 부모들은 “조금만 더 …” 하며 허리띠를 졸라맸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같은 꿈, 같은 결의가 추억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아리디 아린 통증 한줄기 가슴을 관통했을 것이다. 특히 마음에 짚이는 선수가 나오미 나리 남이다.
남가주 어바인에서 자란 남나리(1985년 생)와 한국의 경기도 군포에서 자라난 김연아는 다섯 살 차이다. 어린 연아가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을 TV로 보며 막연하게 스케이터의 꿈을 품었을 때 나리는 이미 주니어 대회를 휩쓰는 기대주였다.
김연아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미셸 콴을 동경하며 미셸 흉내 내기 놀이를 하던 1999년 남나리는 ‘제2의 미셸 콴’이었다. 전미 피겨스케이팅 선수권 여자싱글에서 미셸 콴에 이어 2위를 하면서 남나리는 차세대 유망주로 한껏 기대를 모았다.
그때 남나리의 목표는 2002년 솔트레이크 시티 동계 올림픽. 하지만 올림픽을 향해 다가가던 그에게 불운이 닥쳤다. 2001년 2월 점프 훈련 중 넘어지면서 엉덩이 관절 탈구, 연골 파열의 부상으로 수술을 받았지만 회복이 되지 않았다. 스케이팅을 접으며 깊은 좌절에 빠졌다.
이후 2005년 남나리는 페어로 재기를 시도했다. 다음해 전미 선수권대회 페어부문에서 5위의 성적을 거두면서 다시 도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번 목표는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
그러나 남나리에게는 다시 불운이 찾아 들었다. 2007년 9월 넘어지면서 같은 엉덩이 부위를 다쳐 수술 받았지만 끝내 회복이 되지 않았다. 1년 후 그는 피겨 계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두 선수는 2007년 11월 중국 하얼빈에서 만날 뻔했었다. 컵 오브 차이나 대회에 함께 초청이 되었었다. 남나리는 부상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김연아는 프리스케이팅 부문에서 우승하며 이후 승승장구했다.
한 사람의 선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그 이면에서는 수많은 선수들이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다. 인기 정상의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며 잊혀진 많은 선수들에게 위로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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