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언제나 자랑스러운 한국인임을 잊지 않고 나라 이름에 먹칠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김명희(87·사진) 대령.
올해 60주년을 맞는 한국전쟁의 산 증인인 김 대령의 애국심은 과연 간호장교 2기 출신다웠다. 뿐만 아니다. 90세를 바라보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대중교통으로 장장 4시간에 걸쳐 플러싱 인터뷰 장소까지 오길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10개도 넘는 훈장과 배지가 주렁주렁 달린 하얀 간호장교복장을 입고 나타난 그는 육군 대령 출신다운 여전한 늠름함이 묻어
났다.
북한 신의주 출신의 김 대령은 일본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 간호학과에서 1년 과정을 마친 후 간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1948년 간호장교 2기생으로 육군에 입대했다. 한국전 당시 대전 2육군병원에서 일했던 그는 "부상으로 병원에 실려 오는 군인이 얼마나 많은지 밤새 치료하고 간호하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져 있을 때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제11대 육군 간호병과장까지 지내며 21년간의 군복무를 마친 뒤 1969년 전역한 김 대령은 1972년 한국정부 지원으로 한 달간의 뉴욕관광과 병원 실무경험 기회를 얻어 미국에 첫 발을 디뎠다."미국에 와보니 정말 축복받은 땅임을 실감하고 정착해 살게 됐다"는 김 대령은 한국에서의 간호 경력이 인정되지 않아 47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에서 간호사 자격증을 다시 취득한 뒤 스태튼 아일랜드 디벨롭먼트 장애인 병원에서 10여 년간 근무했다. 김 대령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동료들이 한국 간호대령 출신답다는 말을 많이 했다. 한 나라의 장교 출신이 일도 못한다는 소리만큼은 듣지 않으려고 이를 꽉 물고 최선을 다했었다"고 말했다.
도미한 뒤로 미동부재향군인회 모임에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는 김 대령은 2003년에는 한국 재향군인회에 6·25 참전용사 직계 후손을 위한 장학기금으로 6,000만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김 대령은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내 남은 인생의 목표는 재향군인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장학생 지원사업을 계속 하고 싶다"고 말했다.김 대령은 내달 25일 열리는 한국정부 주최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 행사’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정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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