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작았던 것들은 커지고 그때 컸던 나는 점점 작아져서 이제는 길길이 우거진 수풀 사이 물벌레의 서식처일 뿐인데, 내 위에 뜨던 달과 별, 스치던 바람과 나에게서 나르시스를 찾던 많은 소년과 소녀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고, 아직 샘물이 솟아올라 내가 우물이었음을 기억할 뿐인데, 다만 또렷한 것은 그때 드리운 많은 그림자들이 내 주위를 돌며 두런두런 이야기 한 일, 맑은 물이 찰랑거려 밤새 잠들지 못하던 내 귀에 분명, 지금 음흉한 칼질로 나를 파헤치는 탐욕스런 저 소리가 아닌, 퐁당퐁당 몸속으로 번져오던 두레박질 소리, 나의 파문을 비추던 선한 눈동자 그리고 언제나 하얀 옷을 입은, 장대한 기골을 가지고도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쓸쓸히 넘어가던 그들이 나의 이웃이었던 것을……. 모를 일이다 천년이 넘게 버려졌던 나를, 지금 미친 듯 고요한 음부에 손이 뻗쳐오는 것은…….
윤준경(1945 - )
우리의 몸은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발해의 우물터를 방문한 화자는 자신이 옛 발해 땅의 풍요로운 우물이었던 것을 느낀다. 그의 몸 속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두레박소리, 그러나 발해의 우물은 이제 물벌레의 서식처일 뿐이다. 흰 옷 입은 사람들의 선한 눈동자와 장대한 기골을 가진 발해인의 노랫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 너른 영토에 물을 대던 수원은 다 빼앗기고 역사만 겨우 마른 샘처럼 남아 있다. 그것마저 자기 것이라고 손을 뻗쳐오는 저, 저, 저…….
김동찬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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