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세 입대, 화천지구전투로 화랑무공훈장
▶ 60년 지나도 전쟁후유증에 시달려
“절대로 죽지 않으니 안심하라. 내가 기필코 살려 주겠다”
사지가 찢겨 나간 부상병이 필사적으로 위생병에게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치료하는 그는 부상병을 안심시켰다.
6.25 참전용사 김춘석(77)씨, 그는 1951년 4월부터 53년 7월까지 육군 5사단본부 의무대대에 소속돼 위생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명의 부상자를 치료하다보면 온 몸이 피로 물들고 죽음이 일상화됐습니다.”
특히 김씨의 5사단이 전투한 강원도 화천지구는 험준한 산악지대로 중공군의 참전후 전선이 고착되면서 2년 넘게 밀고 밀리는 고지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돼 쌍방 전사 및 부상자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 갔다.
“젊은이들은 인민군에 끌려갈 수 있으니 우리는 걱정 말고 자유를 찾아 남으로 가라”
1950년 가을 김춘석씨는 평양시 중성리에서 살다가 형님과 함께 남하하는 UN군을 따라 서울로 왔다.
형제를 떠나보내는 김씨의 부모님은 “나이든 우리는 걱정 말고 빨리 가라”고 형제를 위로했다고 한다. 그것이 부모님과 마지막이 될 줄은 김씨는 몰랐다.
1950년 12월, 형제는 같이 월남한 사촌형제 3명과 같이 국군에 입대했다. 이때 그의 나이 17살, 함께 입대한 5형제는 부산 구포에 있는 제2훈련소에서 기초훈련을 마친 후 이듬해 각각 5사단, 3사단에 배속돼 춘천으로 이동 전투에 투입됐다.
“18살인 저를 부대장은 ‘꼬마군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워낙 나이가 어려 당시 사단장이던 민기식장군 등 부대간부들은 누구보다도 그에게 따뜻하게 대해줬다고 회고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분들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부대는 곧바로 강원도 화천일대로 이동, 전투에 참가했는데 그때부터 김씨의 위생병으로서의 파란만장한 활약이 시작됐다.
“1951년 어느 겨울밤 사단수색대가 적의 기습을 받았습니다.”
그날 김씨는 적군의 포격으로 부상한 군인 13명을 응급처치해 후송했는데 그 와중에 본인도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아침에 세수를 하는데 온 몸이 피투성이였어요. 부상병의 피려니 여겼는데 내 왼쪽가슴과 오른쪽 정강이에서 흐른 피가 온 몸을 적시고 있는 거예요.”
그날 전투에서 김씨는 자신이 파편상을 입은 줄도 모르고 밤새 부상병을 치료한 것이다.
노병은 그날 전투에서 입은 흉터를 기자에게 보여줬다. 그 상처는 60년이 지난 오늘까지 치유되지 않은 민족적 비극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그외에도 화천지구 전투에서 수많은 부상병을 치료한 공로가 인정돼 김씨는 1953년 3월, 병사 그것도 위생병으로는 매우 드물게 ‘화랑무공훈장’을 추서 받았다.
휴전이 된 이듬해인 1954년 7월 김씨는 육군에서 만기제대했다.
“지금도 그놈들의 만행에 치가 떨립니다.”
김씨는 평양에서 체험한 공산정권의 횡포와 전쟁중에 경험한 그들의 만행에 아직도 분노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적개심 하나로 싸웠습니다. 그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겁니다.”
60년전, 김씨처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수많은 우리의 선배들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는 자부심에 차 있지만 최근 본국의 안보정세를 보면서 우려와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기며, 전우들이 치료중에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분노했지만 오늘에 이르러 북한의 작태와 그들에 부화뇌동하는 세력들을 보면 또다시 피가 끓어오릅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많은 분들이 노쇄하고 건강도 악화되고 있으며 연세가 팔순, 구순을 바라보다보니 한분 두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아직도 자다가 가끔 악몽을 꾸는 때가 있습니다,”
전쟁발발 60년이 지난 지금도 김씨는 그때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가끔 악몽을 꾸는 그에게 큰 아들은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잊어버리라고 간청하지만 그에게 삶과 죽음이 무수히 교차했던 전쟁의 상처는 뿌리가 너무나도 깊은 것일까.
“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요. 하지만.....”
참전용사가 시달리고 있는 전쟁후유증은 한민족이 오늘도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는 끝나지 않은 역사의 상처이다. 또한 미주사회에서 자유와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한인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될 한국현대사의 교훈이자 악몽으로 남아 있다.
<박명환 기자>
바로잡습니다.
본보 6월 10일(목)에 보도된 한국전쟁 ‘참전용사 김창현씨의 특집기사’중, 김씨의 육군복무후 전역일자를 1988년에서 1978년으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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