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전선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땅과 바다, 하늘 어디나 전투지였다. 갓 창설된 신생 해군도 육군 못지않은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한국 해군사관학교 1기생인 정규섭 전 해군 제독(85.사진). 한국 해군의 살아 있는 역사인 그는 병참지원과 군사외교란 방식을 통해 6.25 전쟁을 수행했다. 특히 자칫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갈 수 있었던 한국은행 지하실의 금괴와 지폐, 국립경주박물관의 보물들을 안전한 후방으로 수송한 주역이 그였다. 버지니아 비엔나에 거주하는 정규섭 전 제독으로부터 6.25 전쟁의 비화를 들어본다.
“6월25일 이른 아침이었어요. 당직 장교가 비상소집 전화를 했어요. 황급히 출근하니 공산군이 남침을 했답니다. 바로 맡은 바 임무를 챙기기 시작했지요.”
당시 그는 해군소령으로 국방부에 파견돼 제3국(관리국) 제1과 선임장교로 과장 대행을 맡고 있었다. 제3국은 육해공군의 예산집행과 군수 병참 지원 업무를 맡은 중요한 부서였다.
전황은 시시각각 불리해졌다. 내일이 어떨지 모르는 막연함과 불안감이 국방부를 뒤덮었다.
6월27일 아침, 훗날 국방장관과 상공장관을 지낸 김일환 3국장이 그를 불렀다. 김 국장과 함께 한국은행으로 가니 최순주 재무장관과 구용서 총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은행 지하실에는 대한민국의 재산인 지폐와 금괴, 은괴가 보관 중이었다. 이들은 이 국가자산을 어떻게 안전하게 옮기는가를 논의했다. 수도 서울의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한국은행의 금괴와 은괴는 약 4톤으로 모두 89개 상자에 나눠 포장했어요. 이를 헌병사령부가 보내온 GMC 트럭 2대에 실었지요. 소총으로 경무장한 헌병 1개 소대를 호위시켜 진해로 후송했습니다.”
다음 날 서울은 인민군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하루만 늦었으면 대한민국의 전 재산이 인민군에 넘어갔을 뻔했던 순간이었다.
국방부 3국은 대전으로 후퇴했다. 마침 금융조합 창고에 미곡 1만여 석이 쌓여 있는 걸 찾아냈다. 전쟁을 치르는데 쌀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미곡 후송문제를 고민하다 마침 부산에 상륙한 미 육군 병력을 싣고 대전에 온 화물열차를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창고 옆에 화차를 대고 미곡을 실어 부산으로 내려 보냈지요. 얼마 뒤 남은 미곡 약 5천 가마니의 쌀을 10동의 화차에 만재하고 출발하려 하니 기관사가 사라지고 없어요. 어디선가 요란한 총소리가 나니 인민군들이 들어온 줄 알고 도망친 거였지요. 미곡을 놔두고 대전을 떠야할 위급한 지경이었지요. 제가 열차 출발을 급히 정지시키고 객실을 누비며 기관사가 나타나기를 호소했습니다. 만약 나타나지 않으면 나중에 중벌을 면치 못할 거란 경고를 하니 얼굴과 옷에 석탄 칠을 한 기관사가 살려달라고 두 손을 빌며 나타나 부산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후송된 쌀은 군량미와 부산으로 밀려 내려온 수많은 피난민의 식량으로 요긴하게 쓰여졌다.
전선은 다시 낙동강으로 남하했다. 제3국은 대구에 임시 사무실을 설치했다. 7월 하순이었다. 경주가 위험하다는 급보를 받았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밤이었습니다. 김일환 국장과 GMC 트럭 한 대를 데리고 경주로 달려갔어요. 처량하고 다급한 마음이 들데요. 국립박물관에서 국보를 모두 포장해 진해로 후송했습니다.”
1년여 국방부에서 전쟁을 치르던 그는 진해 해사의 고등군사반에 입교했고 미 유학, 해군본부 조달감을 거쳐 52년 일본 동경의 유엔군 사령부에 신설된 한국 군사사절단 해군대표로 발령받았다.
전후에는 55년부터 주미 대사관 해군 무관, 해군 72함 함장, 해군 관리부장(준장)을 거쳐 1961년부터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66-68년 주미 대사관 정무공사, 주 뉴욕 총영사, 외무부 차관보, 튀니지 대사를 역임하다 74년 은퇴하고 이듬해 도미했다.
황해도 출신으로 개성상업학교를 마친 후 공산당이 싫어 월남했다는 정규섭 전 제독은 1947년 2월 해사 1기로 졸업하며 해군의 주역이 됐다.
그는 “6.25는 우리 민족에 큰 재앙이자 비극이었다”며 “모두가 피흘려 싸워 지켜낸 조국이 다시 전쟁의 광풍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전 국민들이 흩어지지 말고 뭉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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