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기가 10년마다 되풀이되는지 20년간 개인적으로 두번 ‘사경’을 넘었다. LA본사에서 ‘명퇴 0순위’에 몰렸다가 시애틀지사로 발령받아 기사회생한 것이 10여년전이다. 20여년전인 1990년대 초에도 구조조정의 감원 칼날이 필자 바로 앞에서 멎었었다.
당시 필자는 동료들을 옥죈 걸프전 불황의 실상을 알아보려고 전국 한인사회를 아우르는 특집기사를 썼었다(1991년 3월2일자). 시애틀판에도 전재된 그 기사를 다시 보니 LA에선 봉제, 스왑밋, 페인팅, 식당, 자동차판매 등 한인들의 주업종이 모두 썰렁했다.
실업자가 많아져 LA 한인회에 일자리 알선을 부탁하는 구직자가 구인 의뢰자를 3배가량 앞질렀다. 뉴욕에서도 문 닫는 청과상과 귀금속상이 속출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선 관광경기가 40%나 떨어졌고, 역시 관광이 주업종인 하와이 한인사회도 현지 한인들이 찾는 몇몇 술집들만 그럭저럭 유지됐다. 시카고 잉글우드 지역의 한인업소들도 불황을 탔지만 주 고객인 흑인주민들의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향상돼 다른 지역보다는 타격이 덜 심각했다.
거의 20년 전에 쓴 그 특집기사엔 신통하게도 시애틀 한인사회가 전국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 안정된 경기를 구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애틀의 경기를 좌지우지하는 보잉이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걸프전쟁에 3만여 군인을 파병한 군사도시 타코마의 경우 ‘약간 동요가 있지만’ 타코마 코리아타운의 한인업소들은 주로 한인들을 상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불경기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있다”고 이 기사는 나름 분석했다.
당시 필자가 동경했던 활황 도시 시애틀이 20년만에, 필자가 전근해 온지 10년만에, 극심한 불경기를 겪고 있다. 후배기자가 요즘 전국의 불황상황을 다시 종합해 쓴다면 “시애틀 한인사회는 전국 어느 지역보다 더 심각한 경기침체에 빠져 있다”고 쓰고 “시애틀의 경기를 좌지우지하는 보잉도 전대미문의 대량해고를 감행하고 있다”고 이유를 달 것 같다.
오래 동안 본보의 든든한 배경이 돼줬던 광고주들이 대부분 고전하고 있다. 특히, 광고지면의 대부분을 점유해온 부동산과 융자 분야의 광고주들이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광고주는 아니지만 세탁소, 테리야끼 식당, 그로서리, 모텔 등 평소 불황과 거리가 먼 것으로 인식됐던 업종들도 매상이 크게 떨어졌다며 한숨이다. 이미 폐업한 업소들도 많고, 모기지를 내지 못해 집을 차압당한 후 길거리에 나 앉을 위기에 처한 한인들도 적지 않다.
요즘은 어디를 봐도 어려운 사람들뿐이지만 불경기를 개인적으로 극복하긴 어렵다. 대다수 한인업종이 주류사회의 경기회복에 기댈 수밖에 없는 소규모 자영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경기는 끝나게 마련이다. 10년전 불황도 8개월만에 끝났고 사상최악의 30년대 대공황도 43개월 만에 끝났다. 시애틀의 경우 좀 늦게 시작해서 좀 늦게 끝날 뿐이다.
자포자기하며 한국으로 역이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불황의 미덕은 희망과 인내다. 아랍인들의 속담에 “햇빛만 받는 땅은 사막이 된다”는 말이 있다. 비도, 눈도, 구름도 참고 견뎌야만 곡식도, 초목도 자란다는 뜻이다. 소낙비가 없으면 호화로운 7색 무지개를 볼 희망도 없다. 굼벵이는 10여년을 땅속에서 인고한 뒤에야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매미가 된다.
‘희망가’라는 작자미상의 옛날 유행가가 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세상만사를 잃었으면 희망이 족할까’라는 내용이다. 제목이 희망가이지, 사실은 ‘절망가’이다. 우리 선대들은 일제치하의 절망상황에서 이 노래를 반어적으로 부르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견뎌냈던 것 같다.
문병란 시인은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라는 잠언형식의 ‘희망가’를 읊었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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