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베이커스필드에서 있었던 6.25 참전용사 위로만찬회에 참석했다. 속속 그들이 식장 주차장으로 도착하면서 나를 보자 고맙다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님으로 참석했지만 그들에게 주최 측 인사인 것처럼 “고맙다, 반갑다”라며 식장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큰 성조기 풍선과 꽃으로 장식된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벽안의 노 병사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고 갑자기 코가 매워졌다. 정해진 순서대로 국가에 대한 맹세와 국기에 대한 예를 올리는 그들의 거수경례는 어느 젊은 병사들보다 힘차고 꿋꿋했다.
나는 감사장들을 전하러 온 그 지역 정치인들의 보좌관들과 세살 때 6.25를 겪었다며 영시를 써 온 모 교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그 전쟁을 상기했다. 한국 정부에서 보내온 전쟁 당시와 지금의 한국을 비교하는 영상자료를 보면서 모두 박수를 보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그들은 그 참상을 보고 당신은 그때 어디서 뭘 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아홉 살이었던 나는 대구의 우리 집에서 B29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고 밤에는 지붕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지나가는 포탄을 보며 미리 파놓은 방공호를 들락거렸다. 그리고 당시 미군 사령관의 통역관이었던 고 황성수(전 국회부의장) 목사 가족들이 피난 와 같이 있어서 우리 집 앞에 미군 트럭을 대기해 놓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군 병원이나 막사로 변했고 산으로 강으로 다니며 수업 받던 일이며 집에서 가까운 방천에서 떠내려 온 시체를 무수히 봤다고 하자 그들의 큰 눈이 더욱 더 커졌다.
여러 순서 중 노병들의 경험담을 나눌 기회가 되자 여기저기에서 손을 번쩍 들었다. 한 히스패닉 참전용사는 같이 입대해서 한국전쟁에 파병된 두 죽마고우를 잃었는데 한 친구는 아직 시신도 찾지 못했다며 끝내 울음을 터트렸고, 또 한 병사는 자기와 같이 한국전에 파병된 사촌을 잃었다며 흐느꼈다.
그 날 초청된 참전용사들의 나이는 모두 80을 넘겼으니 앞으로 그런 감사의 보답을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그 중 잊을 수 없는 것은 전쟁 중에 배운 아리랑을 음정과 발음까지 똑똑하게 부르며 웃는 노병의 눈에 맺히던 이슬이다. 그런 만행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도 반성은커녕 틈만 나면 도발을 일삼는 북한 얘기를 그들과 같이했다.
학창시절 6.25 때면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노래를 교정에서 부르며 묵념으로 전몰장병들의 명복을 빌고 아픔의 역사로 교훈을 삼던 그 교육은 어디로 사라지고, 6.25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자라서 애국 민주주의를 외친다니 어이가 없다.
6.25 참전용사들이 그 참상을 증언하는 오늘도 그렇거든 하물며 훗날에는 그 사실조차 지워버릴 것이다. 분노를 키우자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어느 시절 어느 사건에나 올곧아야 한다.
과거의 역사가 미래의 거울이라면 바른 역사의 교훈은 미래의 지침이 되어야 한다. 현충일이 있지만 6.25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성호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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