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7월이면 가슴에 와 닿는 행사가 ‘윤동주 문학의 밤‘이었는데 금년에는 한일합병 100년을 맞아 저항시인 만해, 이상화, 이육사, 윤동주 네 분을 추모하는 문학의 밤 행사가 열린다. 그래서 멀리 휴스턴에 있지만 잠시나마 민족 시인들의 체취를 맡고 싶어 행사장인 남가주 이성호 시인의 산장으로 가기로 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연인원 16만5천명의 의병들이 일어났고 그 후 나라 안팎에는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런데 글로써 의사표시를 한 저항시인은 다섯 손가락이 채 안 된다. 오는 24일 밤 ‘문학의 밤‘의 주인공들인 윤동주, 만해, 이상화, 이육사 말고 더 있을까?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문학은 우리의 그것보다 돋보여 부끄럽다. 독일의 비시정권에 협력한 작가들도 많았지만 대항한 숫자도 적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긴 시간 동안 글로써 못된 짓을 한 문인들을 많이 보게 된다.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을 비롯하여 천재 이광수는 왜 그랬을까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그리고 미당 서정주의 시를 많이 애송하지만 그도 민족 시인의 아웃사이더의 길을 걸었다.
젊은 청년 윤동주는 그의 시 ‘십자가’에서 “…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고 노래하고 그의 시와 같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체 실험용으로 산화하였다.
큰 집(총독부)이 보기 싫어 북한산의 자택 방향도 바꾸었다는 만해는 조국을 ‘님’이라 표시하여 3인칭이 아니라 2인칭이었다. 이육사는 16번이나 감옥에 드나들었다 한다.
고국에서 핏대 올리는 정치가들은 많지만 나라 사랑하는 모습은 보기 어려운데 이번 기회에 민족 시인들의 숨결을 느껴 보고 싶다.
허도성 / 목사·텍사스 문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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