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장에서 연주되는 웨딩마치는 관례적으로 정해져 있다. 신부가 아버지와 입장할 때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3막에 나오는 혼례합창곡, 신랑신부가 함께 퇴장할 때는 멘델스존의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 끝부분에 나오는 결혼행진곡이다.
바그너가 엄숙하고 장중한 반면 멘델스존은 가볍고 환상적이다. 멘델스존은 17세 때 섹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읽고 그 환상적인 분위기에 매료돼 서곡을 작곡한 후 17년 뒤 결혼행진곡을 포함한 12곡을 추가해 총 13곡의 극음악을 완성했다.
필자도 소싯적에 섹스피어의 4대 희극에 끼는 ‘한여름 밤의 꿈’을 읽었는데 멘델스존 같은 천재가 아니라서 환상적 분위기는커녕 복잡한 내용의 갈피를 잡느라고 애를 먹었었다. 거의 잊어버렸지만 아직 기억나는 것은 숲속 도깨비나라의 왕비가 잠에서 깨자마자 처음 눈에 띈 당나귀에 홀딱 반해 열렬히 쫓아다닌 장면이다. 왕비와 부부싸움을 벌인 왕이 그녀가 잠든 사이 눈꺼풀에 그런 효과를 내는 사랑의 묘약을 발라뒀기 때문이다.
이 숲에 결혼을 허락해주지 않는 부모와 결별한 갑순이와 갑돌이가 들어오고, 갑순이를 짝사랑하는 복돌이와, 복돌이를 짝사랑하는 복순이도 뒤따라오면서 사각관계가 벌어진다. 왕은 복돌과 복순을 맺어주려고 ‘마당쇠’ 도깨비에게 사랑의 묘약을 복돌의 눈꺼풀에 발라주라고 명령했지만 마당쇠는 덤벙대다가 갑돌에게 발라줬고, 갑돌은 잠에서 깬 뒤 맨 처음 눈에 띈 복순이와 사랑에 빠진다. 실수를 깨달은 마당쇠가 복돌에게 약을 발라주자 복돌이도 복순을 사랑하게 돼 처음과 정반대의 엉뚱한 사각관계가 이뤄진다. 갑순이는 배반당했다고 울부짖고, 복순이는 두 남자가 짜고 자기를 놀린다며 앙탈한다. 당황한 왕초 도깨비는 두 쌍을 따로 잠재우고 처음 눈꺼풀에 발랐던 약의 효력을 지운 뒤 다시 사랑의 묘약을 발라줘 갑순-갑돌, 복순-복돌의 커플을 맺어준다. 숲 밖 마을 촌장은 이들 두 쌍을 불러 자기와 합동결혼식을 올리도록 해준다.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은 바로 이 장면에서 연주된다.
이 희극엔 “사랑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본다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분별력이 없는 법…그래서 사랑의 천사 큐피드는 장님으로 그려져 있지…” 등 유명한 대사가 많이 나온다. 섹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을 그렸지만 ‘한여름 밤의 꿈’에선 주요 등장인물 세 쌍이 모두 사랑을 이루는 해피엔딩으로 끝맺는다.
한여름 밤의 꿈 말고 봄에 꾸는 꿈도 있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다. 봄철에 꾼 한바탕의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환상보다는 공상에 더 가깝다. 일장춘몽을 대표하는 고사성어에 ‘남가일몽(南柯一夢)’이 있다. 남가라는 고을의 태수가 돼 20여년이나 떵떵거리며 살았는데, 사실은 남쪽으로 가지를 뻗은 자기 집 마당의 나무(南柯) 아래서 잠깐 낮잠을 자며 꾼 꿈이었다는, 당나라 때 전기소설에 나오는 얘기다.
이조 때 김만중이 쓴 한글소설 ‘구운몽’도 주인공 양소유가 하룻밤 꿈속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깨어나 삶의 무상함을 깨닫고 불법에 귀의한다는 내용이다. 그 뒤 나온 ‘옥루몽’과 ‘옥련몽’ 등 몽자 돌림 소설들도 인생의 부귀영화를 덧없는 꿈에 비유하고 있다.
‘한겨울 밤의 꿈’이나 ‘일장추몽(秋夢)’이라는 말이 없는 걸 보면 환상(공상)적 꿈은 역시 봄, 여름에나 어울리는 모양이다. 여름이 짧은 시애틀에 살면 꿈꿀 기회도 적은 것일까?
필자도 엊그제 ‘한여름 밤의 꿈’을 꿨다. 섹스피어의 희극만큼 복잡했고 전개과정이 멘델스존의 음악처럼 빨랐지만 내용을 전혀 기억할 수 없다. 한마디로 개꿈이다. 오늘밤엔 ‘사랑의 묘약’을 개발하는 꿈을 꾸고 싶다. 그것이 한여름 밤에 썩 잘 어울리는 꿈일 것 같다.
윤여춘(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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