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숙주 나물을 좋아한다. 아내가 무쳐 주는 그 나물은 고소한 참기름과 함께 아주 그맛이다. 만두 속에 들어가는 숙주도 좋아하고 베트남 국수집에서 먹는 날숙주도 아주 좋아 한다. 한마디로 난 숙주 나물 팬이다.
그런데 이놈의 숙주 나물은 잘 쉰다. 냉장고에 넣어 놓아도 며칠을 가질 않으니 아무리 좋아한들 왕창해 놓고 매일 꺼내 먹기는 영 그른 음식이다. 원래는 이름이 녹두 나물이던 것이 잘 변한다고 변절자 신숙주의 이름을 따서 숙주나물로 불려졌다. 살아서 호의호식했지만 결국 민초들에게 심판을 받은 꼴이다. 그 때가 1400년경이니 무려 600여년을 전국 가가호호에서 그리고 이곳 미국까지 신숙주의 이름이 불명예스럽게 불리고 있다. 앞으로도 천년만년 그렇게 불릴 터이니 자신의 영달을 위해 지조를 팔아넘긴 대가를 정말 톡톡히 치르고 있다하겠다.
여기 또 한사람이 있다. 그는 1970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입학 후 1971년 10. 15 부정부패척결 전국학생시위와 관련해 제적되었다. 1971년부터 72년까지 고향 경북 영천에서 4H운동, 야학 등 농민운동을 하였으며, 1974년에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항한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하여 제적되었다. 이후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1974년에는 청계천 피복공장 재단보조공으로 근무했으며, 그 후 전국금속노동조합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85년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1980년 독재정권 시절 구속 후 고문 받고 수감 중 기소유예로 석방되어 한일도루코에 복직한 바 있으며,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서노련) 지도위원이던 1986년 인천 5.3 직선제 개헌 투쟁으로 구속되어 고문을 받고 2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여기까지 그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다.
이후 그동안의 입장을 완전히 바꿔 3당 합당을 통해 창당된 민주자유당(민자당)에 1994년에 이재오와 함께 입당한 후 1996년 민자당의 후신인 신한국당 공천으로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부천시 소사구에서다. 그리고 경기도 지사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33대 경기도 지사인 김문수씨의 약력이다. 김문수씨가 왜 민중당을 떠나 한나라당으로 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가 무언가 말한 적을 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사실 뭐, 특별한 이유가 있었겠는가?
“만약 우리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가 안 됐다면, 그리고 분단이 안 되고 통일이 되어 있었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었을까. 저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문수씨의 기가 막힌 망언이다. 자신의 좌파경력을 희석시키기 위해 보수들에게 던진 립 서비스라 생각된다.
신숙주 시대는 왕조의 시대였다. 신숙주와는 달리 세종의 왕위 찬탈에 저항했던 사육신, 생육신들은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거나 세상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들이 충성하려던 단종도 결국 고려 왕조를 칼로 무너뜨린 이성계의 후손이 아닌가? 세상의 주인이 왕인 시절엔 자기를 알아주는 왕에게 충성하는 게 꼭 변절로만 볼 수만은 없었다.
신숙주가 불쌍하다. 신숙주말고도 변절자가 너무나 많으니 이제 변절자 대표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으면 한다. 그래서 숙주 나물을 이제 문수 나물, 재오 나물 등으로 부르길 제안해 본다.
이덕근
‘사람사는 세상 워싱턴’ 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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