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은 멀어만 가고 상처는 자꾸 되살아나
형수씨 주걱에서 옮아 묻던 정이나마
스미어 골수에 배듯 흥건하게 고인다
푸념도 길이 들어 개개풀어진 어린 것들
죄 없는 두 뺨에는 수묵(水墨)으로 수를 놓고
만 갈래 시름을 눕혀 꿈이 다만 깊어라
앙상한 가슴팍에 그들먹한 한을 두고
다리 상한 제비 품듯 막내를 그러안은 채
깃빠진 어미새처럼 짐짓 잠든 집사람아
문구멍 구멍마다 기웃거리는 어진 달빛
놈들의 숨소리며 주름 고운 어미 볼을
촉촉이 어루만지는 손길이여 자장가여
형님네 마을쯤이랴 여울져 오는 퉁소 소리
흐느껴 굽이치는 오막살이 지붕에서
두렷한 가을 달 아래 박이 둥둥 여문다
정하경(1927 - )
어느 해 가을의 달밤을 떠올리며 잠 못 이루는 화자는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이다. 흥부다. 배고픔을 참고 짐짓 잠이 든 척하고 있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연민이 가득하다. 그러나 슬프지만은 않다. 지붕에 열린 박 속에 무엇이 가득 들어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민자의 방 안에 스며들어 가슴을 어루만지는 저 달도 몇 년 후에는 ‘어느 해 가을 달밤‘으로 추억될 것이다. 둥둥 박이 여문다. 한가위 달이 뜬다.
김동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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