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들은 시를 읽는다든지, 무겁고 어두운 계절을 만나면 마치 색이 바랜 회색 외투를 입듯 쓸쓸한 감상에 젖는다. 그러나 나는 이 나이에도 그런 기분에 젖어 가슴이 떨릴 때가 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나 거센 빗줄기가 창을 때릴 때, 또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그런 날에는 아직도 창이 넓은 찻집을 찾아가 뜨거운 커피를 찾는 순수가 있다.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시인이 쓴 책을 읽으며 낡은 벽화 앞에 선 듯 우울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흘러간 영화 한편에 대한 감상이었는데 그 타이틀은 엘비라 마디간이었고 나는 그 짧은 글을 통해 영화를 보는 감동을 가졌다. 이 영화는 60년대 스웨덴 영화였다. 대개 시는 짧고 산문은 길듯 대부분의 가식 없는 사랑은 시처럼 짧게 끝나고 그 짧은 며칠의 사랑이 한 인생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엘비라 마디간도 그런 사랑을 파헤친 작품이었다.
서커스단에서 도망친 처녀 엘비라와 군대에서 탈영한 청년 장교 식스틴, 그들은 마치 문정숙과 신성일이 그려낸 만추(晩秋)를 닮았다. 엘비라 마디간은 모차르트를 좋아했고 어린 새와 같은 백치미가 있는 여자였다. 그리고 짧지만 인생과 사랑에 대한 정의가 그들의 대사를 통해 날개처럼 펄럭였다. 여자가 말했다. “사랑이 죽는다는 건 못 견딜 일이예요. 차라리 사랑보다 우리가 죽어요.” 그들은 마지막 피크닉을 위해 남의 집 닭장에서 달걀을 훔쳤다. 여자가 물었다. “이 달걀을 어떻게 삶을까요?” 그때 남자가 대답했다. “물이 뜨겁게 펄펄 끓을 때부터 4분간, just 4 minute,” 이 말은 그들의 사랑을 아주 농축해서 표현한 말이다. 물이 뜨겁게 펄펄 끓는 4분 동안만 사랑하는 것, 식은 물은 용납하지 않는 것, 그들은 봄의 들판을 달렸다. 순간 여자가 흰 나비를 두 손으로 잡았고 마치 그것이 신호인 양, 두 발의 총성이 들리더니 소네트처럼 아름다웠던 사랑이 끝나고 말았다. 엘비라가 쓰러지며 두 손을 폈다. 그러자 그 손안에 있던 하얀 나비가 날아갔다. 기다렸다는 듯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이 전율하듯 스크린을 채웠다. 대강 이런 줄거리이지만 이따금 그들이 말했던 펄펄 끓는 4분간의 사랑을 반추하며 이 시대의 상실된 사랑과 비교해보는 것이다. 이 시대에도 분명 사랑은 있다. 그러나 이 시대는 크라이막스만 있을 뿐 프로세스가 없다. 모차르트 대신 헤비메탈이 사랑의 자리를 채운다. 엘비라 마디간은 사랑이 죽는 대신 내가 죽겠다는 말을 남겼다. 인간은 오염되어 있지만 사랑을 오염시킬 수 없다는 순수의 표현이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파수군들이라 하여 과언이 아니다.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제일 많이 쓰고, 그래서 그 사랑을 제일 많이 움켜쥐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너덜거리는 깃발을 닮았다. 뉘라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오염되지 않은 순수 그 자체라고 믿어줄 것인가. 차라리 내가 죽더라도, 4분만이라도, 사랑이 깨끗하게 보전되기를 원하는 그 마음, 차라리 내 슬픔이 그냥 남겨져 있어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은 절개처럼 남아 있기를 원하는 그런 사랑을 보고 싶다.
2차 세계대전 때 40명의 군인을 싣고 가던 비행기가 남태평양 파도 위에 불시착했다. 군인들은 바다에 표류한 채 21일간을 연명했는데 그때 살아남은 한 군인이 그때의 순간을 회상했다. “그들 중에는 무신론자도 있었고,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살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몇 명의 크리스천들이 그 악전고투 속에서 찬송가를 부르자 그들도 입을 열었으며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자 그들도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따라했다. 그 순간이야말로 그리스도가 사랑을 위해 죽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식어버린 가슴에 불을 지피고 싶다. 밝아진 문명의 거리에서 색깔만 화려한 사랑이란 단어에 온기를 불어넣고 싶다. 그리하여 위기 속에 찾아오는 사랑의 실체를 이 겨울에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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