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에는 무거운 몇 권의 책과 다른 어깨에는 도시락이 든 손가방을 메고 한 반 남학생과 장충공원을 산책했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내려오는 길에 의견 충돌이 있었다. 그저 보통 때와 같이 지나가려니 하고 시작한 것이 잘못 실수로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재빨리 사과를 할 뜻도 없고 망설이며 내려오고 있는 중에 파출소를 발견하고 뛰어 들어 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내 입에서 거침없이 나오는 말은 “저 남학생이 저를 괴롭혀요”였다. 그 남자를 데리고 들어오고 나는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가 이것저것을 질문한다.
얼마 후 바깥 쪽에서 신문을 하던 경찰이 “좋은 학생 같은데 잘 지내보지 왜?” 그러는 것이었다. 얼굴도 괜찮고 좋은 대학을 다니며하는 말도 그렇게 꺼덕거리지도 않는 것 같아서 주의만 주고 집으로 돌려보냈다며 30분만 여기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파출소를 나오니 겁이 부쩍 들었다. 세상이 온통 캄캄하고 어디가 어딘지 구별조차 하기 힘든 거리. 산책을 하는 인파도 끊겨 적막이 흐르니 무서운 짐승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진짜로 악한 사람이 나와서 나를 해칠 것 같은 느낌이 드니 30분 전 일들이 어찌나 후회스러웠는지 몰랐다. 파출소가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내려오니 갑자기 나무 뒤에서 사람이 슬그머니 몸통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어찌나 놀랐는지 거의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보니 먼저 파출소를 나간 그 학생이 아닌가! 그제서야 전신의 근육이 이완되고 마음에 긴장감도 풀리는 것 같았다. 왜 집에 가지 않고 나무 뒤에서 기다렸느냐고 물었더니 처음 와 본 길인데 당황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지금까지 기다렸다는 것이다. 우선은 고마웠지만 조금은 바보스러워 보였다. 평소에 밝고 명랑했던 성격과 재치 있던 말투는 어디로 가고 풀이 죽어 있는 모습. 두 어깨 축 늘어뜨리고는 한마디 말없이 옆에서 걸어준다.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는 그의 모습에서 빨리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겠다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빨리 뜨거워지지 않아도 담뱃불 같이 그렇게 뜨거워지지 않아도 좋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말을 해주는 것 같았고 네가 지금, 아니 영원히 나를 바보로 만들더라도 떠나지만 않는다면 참고 견디리라 하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왜 너여야만 되느냐고 묻는다면 나에게 “그에 대한 답은 없다”라고 말할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무언의 발자국을 뒤로 남기다 보니 버스 정류장까지 왔다. 버스에 오르는 나를 보고 뒤에서 “안녕히 가세요”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것도 잠깐. 어둠 속에서 뒤를 보니 잘 보일 리가 없었다. 자리에 앉아 차창 밖을 내다보며 ‘사랑’이란 말을 생각해 보았다. 사랑이란 기다림이던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닌 간절하게 원하는 적극적인 기다림. 이것이 사랑의 속성 중 하나임을 조금 느끼고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또한 사랑은 복종인 것도 느꼈다. 두 무릎을 꿇고 애걸하는 복종이 아닌 오직 당신에게만은 져 주는, 져 주고 싶은 꿀맛 같은 복종, 이런 것이 사랑인가? 사랑은 쓰려도 좋고 한 없는 한숨과 막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로 얼룩진다 해도 버릴 수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인가 보다 하는 생각을 그의 모습에서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봄날 이슬비를 맞고 걷노라면 처음엔 기분이 좋음을 느끼나 조금씩 젖어오는 줄 모르고 시간이 지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신을 적셔놓고 옷에서 물방울이 떨어질 때라야 젖었군을 의식하는 것,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 사랑이겠지? 사랑은 생각하는 것, 사랑을 한다는 것은 상대를 내 자리 내 입장에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의 눈높이에 맞춰져야만 하고 내가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조금은 바보스러운 것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며 보낸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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