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휴전된 건 꼭 58년전인 1953년 7월 27일이다. 그로부터 20년만인 1973년 7월 11일 이른 아침 필자는 남산 적십자사 앞의 버스 안에 앉아 있었고, 달포 전에 결혼한 나의 신부는 겁먹은 표정으로 잔뜩 움츠린 채 밖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버스엔 남북적십자 제7차 본 회담을 위해 평양으로 가는 대한적십자사 대표단의 수행원들과 기자단이 타고 있었다. 수행 실무진은 전에도 다녀왔지만 기자들은 모두 초행길이었다.
1차, 3차, 5차 평양회담엔 신문 방송사의 국장급 간부들이 다녀왔고 7차 회의에서야 비로소 적십자사의 상부기관인 보건사회부를 출입하는 일선기자들에게 차례가 왔다.
판문점에서 북한의 구식 일제 버스(천장에 선풍기가 매달렸다)에 옮겨 타고 새로 포장된 아스팔트 2차선 도로를 따라 약 5시간 후 평양에 도착했다. 해방 후 30년간, 휴전 후 20년간 금단의 땅으로 닫혀있던 북한에 들어간다는 건 큰 행운이자 모험이었다.
평양의 ‘보통강 려관’에서 4박5일 체류했는데 회담내용은 ‘실패로 끝났다’는 것 말고 기억나는 게 없다. 적십자회담은 7차를 끝으로 장기 교착상태에 빠졌다가 12년 후인 1985년 5월 8차 회담이 열렸다.
사흘 전 휴전협정 58주년 기념일에 서울을 강타한 ‘물 폭탄’처럼, 1984년 여름에도 중부지방에 호우가 쏟아져 엄청난 피해를 내자 북한이 적십자사를 통해 구호물자를 보내겠다고 제의했고 남한 측이 이를 받아들여 대화재개의 물꼬가 트였었다.
7차 회담의 내용은 깡그리 잊었지만 북한 모습이 아름다웠다는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남한의 헐벗은 산들과 달리 판문점부터 평양까지 모든 산에 나무가 울창했다. 검붉은 한강 물과 달리 대동강 물은 새파랬다.
서울보다 도로가 넓고 건물들도 웅장했다. 평양 동물원에서 만난 일반시민들도 서울의 창경원에서 보는 나들이객들과 다른 점이 별로 없었다. 실제로 70년대 초까지 북한의 GNP는 남한을 앞질렀다.
그로부터 다시 38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반전됐다. 북한은 이번에 물폭탄 맞은 남한에 예전처럼 구호물자를 보낼 꿈도 못 꾼다. 오히려 엊그제 남한 가톨릭 단체로부터 밀가루 100톤을 지원받았다.
나무가 울창한 남한의 산들과 달리 북한은 모든 산이 헐벗어서 조그만 물 폭탄에도 사태를 일으켜 논밭을 뒤덮고 농사를 망친다. 굶어죽는 사람이 해마다 수십만 명에 이른다.
이번 물폭탄 사태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서초동 우면산 앞의 고급 아파트단지에 사는 친구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자기 아파트는 피해가 없고 날씨도 개어서 강원도로 골프 치러 갈 계획이라고 했다.
우면산 산사태로만 19명이 죽는 등 전국적으로 사망자와 실종자를 60명 가까이 냈고 간선도로와 지하철이 침수됐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친구의 여유 있는 태도를 보고 한국이 진짜로 걱정해야 할 것은 물 폭탄 아닌 진짜 폭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전협정 기념일을 ‘전승 기념일’로 부르는 북한이 지난 반세기 동안 저지른 정전협정 위반사례는 무려 43만여 건을 헤아린다.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 전두환 대통령을 노린 아웅산(미얀마) 폭파, 김현희의 KAL기 폭파, 작년의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 등 기억에 남는 굵직한 도발행위도 수없이 많다.
남북한 체제의 우열이 판가름 난 건 이미 오래전이다. 이판사판에 몰린 김정일 집단이 연평도 아닌 서울의 심장부를 향해 포탄을 날리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 지상낙원이라는 노르웨이에서도 끔찍한 참살극이 일어난다. 하물며 전쟁이 ‘진행 중’인 한반도에선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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