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날으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약간은 누렇게 변색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사진을 들여다 본다. 아버지는 유난히 딸바보였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눈을 빼어닮은 지긋한 사람에게 마음을 뺏겨 결혼했다. 부성애적인 마음에 아마도 혹 했던 것 같다. 비슷한 나이의 사람을 만나 알콩달콩 지지고 볶으며 사는 것 보다는 가끔은 그 사람의 딸바보로 살아가고 싶었다. 누군가 내게 질문을 했다. “만약 밤 12시에 위급한 사정으로 전화할때, 이유 불문하고 내 곁에 올 수 있는 사람은 있을까?” 그 질문을 받고 이리저리 손가락 꼽아보니 겨우 몇명은 있으나 확실성은 없다. 그러나 내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남편만은 신발 벗은 채 내달려 올 수있는 나의 마지막 보루로 믿고 싶다.
고급 공무원 이셨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2주 전, 꿈에 승진하시는 발령장을 받으셨다고 뛸 듯이 기뻐하셨다. 그당시 아버지는 정년 퇴직하시고, 미국에 이민을 오셔서 살고 계실 때라, 나는 그 꿈이 약간은 불길했다. 그러나 일어가 능통하신 아버지는 일본과 무역계통에서 일하실 계획이 있으셨기에 나는 어리석게도 길몽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그 날은, 큰언니 가족과 함께 오손도손 점심을 드셨고, 노래와 함께 어깨춤도 덩실덩실 추셨는데, 점심 후 식구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 한 시간후 갑자기 뇌졸증으로 쓰러지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다급하게 전화를 했지만 가족들이 미처 차를 돌려서 도착하기도 전에 어머니 품안에서 그만 운명하시고 말았다.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를 마음에 담고 가시듯, 어머니의 눈을 깊고 맑은 눈으로 바라보셨는데… 어머니는 영어로 911에 전화만 했더라도 아버지가 살아 계실거라며, 회환과 원통의 눈물을 지금도 흘리신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 받은 교훈은 불의의 사고를 당할 때, 급히 달려올 사람을 구해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초급 상황에서는 자신만이 자신을 구할 수있다고 생각하여, 평상시에 비상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와 능력을 갖추어 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터넷 세상에 사는 사람 같이 쿨하게 생각하고, 되도록이면 남에게 신세 끼치지 않는 일이 최고 미덕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단 한사람, 내가 언제나 믿고 마지막 보루로 생각하는 그 사람은 언제나 처럼 내 옆에서 내 손을 잡아주고, 또한 달려 오리라 믿으니 세상이 약간은 편안해진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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