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에는 작위(爵位)보다 엽록이 앞선다
고인 물이 하류로 흐르지 않으면
광목필 같은 물은 어디로 갈 것인가
삼백 년 세월은 이 산의 깃을 흔들며 지나갔지만
기슭의 명아주 잎새 하나도 바꿔놓지 않았다
사천 지나 쌍계 마현
섬진강은 비단 필(匹)로
들 가운데 누워 있다
종일 일 없는 너도밤나무를 쳐다보며
문턱에 걸터앉아 계곡물 붇는 것만 구경한다
물살은 서로 싸워도 둑을 넘지 않고
산봉은 손 헤지 않아도 해와 달을 제 등 뒤로 넘겨 보낸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자(修者)가 되는 길만이
유리의 길은 아니다
연꽃 위에 놓인 법구경 한 구절도
누가 공으로 내 마음의 쟁반에 갖다놓겠는가
서릿바람 속에 뼈로 설 수 있어야
마음의 유리를 찾을 수 있다
산은 언제나 나보다 높은 데 있고
물은 언제나 나무보다 낮은 데로 흘러간다
‘산중문답’- 이기철
본디 사람의 마을에도 작위보다 엽록이 먼저다. 엽록이 파업을 하면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사람도 군림할 수 없다. 나무와 들풀이 광합성을 통해 산소와 탄수화물을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다.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사대성인이 살아서 돌아와도 한마디 설법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엽록에 기대어 사는 종속 영양자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삼백 년 세월이 명아주 잎새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저곳은 어디인가? 인걸은 그대로이되 산천은 간데없는 시대가 아닌가. [시인 반칠환]
<이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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