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밤비가 내린다. 기척도 없이 내리는 빗소리에도 내 귀는 활짝 열린다. 터질 듯 충만했던 기쁨의 시간도, 한 걸음에 뛰어넘고 싶었던 걱정거리들도 어느덧 기억 속 흐릿한 영상만 남긴 채 가버리고 없다.
임영조 시인은 ‘시계’라는 시에서 분침과 시침을 가리켜 날카로운 칼을 가진 두 자객이라 고 썼다. 그 두 자객이 서슬 퍼런 칼날을 번뜩일 때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낮과 밤이 그어지고 잘라졌으며 밖에는 남의 일처럼 꽃이 피었다 지고 새가 울다 날아가고 마침내 속 아픈 사람들은 덧없는 세월을 날로 먹고 죽었다고 했다.
이 세상 숨을 곳 없는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은 째깍째깍 무시로 다가오는 발 빠른 자객의 발자국 소리에 꽃잎 지듯 언젠가는 분침과 시침이 휘두르는 칼에 모두 잘려지고 말 것이라고도 했다.
친형제처럼 사랑했던 분이 있었다. 오늘 같이 잠을 놓친 밤에는 더 환한 얼굴로 다가오는 분, 우리 부부의 가슴이 차가운 밤비에 젖는다. 미국으로 오기 전 마지막 주소지였던 전주, 그곳은 우리의 젊음이 쏘시개가 되어 나 아닌 남을 위해 고스란히 태워졌던 곳이었다. 힘든 날들이 많았기에 뒤돌아보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어도 한 번씩 마음이 절절 끓도록 가고 싶은 이유는 그분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곳을 떠나던 날 남편의 몸을 살며시 감아 안고 찍은 사진이 우리와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을.
미국에 와서도 우리는 가끔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추억이 무디어져 갈수록 오가는 소식도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러는 사이 우리 집 주소와 전화번호도 바뀌었다. 지난 봄 나는 우연히 옛 수첩을 뒤적이다가 그분의 전화번호가 눈에 들어오자 무엇엔가 빨려 들어가듯이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상대방이 말도 잘못하고 나를 부르며 쉰 목소리로 울기만 하는 것이었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분 아내의 말을 들어보니 그분은 위의 시처럼 췌장암으로 생이 막판으로 몰리게 되자 추격해오는 분침과 시침의 칼날을 피해보려고 병원에 숨어 있는 중이었다. 연락할 길은 없고 우리를 빨리 찾아보라는 남편의 성화가 너무 안쓰러워 아내는 우리에게서 연락오기를 밤 새워 기도했고 그 기도의 응답이듯 내게서 전화가 온 것이었다.
전화기를 바꿔 쥔 남편의 꼭 감은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차마 눈감지 못한 어느 한 사람이 당장 갈 수 없는 머나먼 곳에서 말려 올라가는 혀를 힘겹게 펴가며 물방울처럼 진실한 고백을 한마디씩 떨어뜨렸다. “제가 지난날 그 때 그 일로 두 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두 분은 제 생애에 가장 소중한 분들이셨습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가 감사했습니다. 그 어려웠던 날 우리와 함께 해주셨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겁니다. 가 뵙지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정말 보고 싶습니다.”
며칠 후 그분은 우리에게 돌아가신 사진 한 장 남겨놓고 진달래꽃으로 불이나 버린 순창 어느 산에 새 유택을 마련해 들어가셨다. 쉰 두 살 아쉬운 나이에.
지난 토요일 췌장암으로 인해 마지막 남은 날들을 정리하시면서 모두에게 감사했다며 작별 인사를 하신 강영우 박사님의 글을 읽었다. MBC 기획 특집드라마 ‘눈먼 새의 노래’처럼 강 박사님은 눈먼 새가 되셨지만 대신 눈이 되어주셨던 석 여사님과 함께 세상 구석구석을 날아다니시며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어가시다 더 이상 날 힘이 없어 날개를 접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셨다.
실명했기에 책도 쓸 수 있었고 봉사도 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는 강연들을 하실 수 있었다는 말씀, 두 눈을 잃으셨기에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다는 고백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처럼 마지막 고백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겨준 가장 큰 선물이고 슬픔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약이며 그리움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순한 가을햇살이다.
남현실
시인, 락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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