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십의 생신을 축하한다고 멀고 가까운데서 자녀들, 손자손녀들, 증손자 증손녀들이 찾아왔다. 정말로 내가 구십 년을 살았던가(?) 하는 상념이 마치 남의 일같이 느껴진다. 떠들썩하는 가운데 잠시 지나간 일을 되돌아본다.
십대에는 자라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십대에는 살길을 찾아 피해 다니기에 정력을 쏟았다. 일본의 침략정책 아래 공립학교 교사를 하면서 정권이 강요하는 ‘지원병’이 되지 않으려고 피해 다녔다. 해방 후 소련 점령 아래서 마을 젊은이들에게 반공사상을 교양한다고 만용을 부리다가 보안당국의 소환을 받고 야간도주를 했다. 신학교 기숙사에 숨어살다가 아내와 함께 두 아이를 데리고 38도선을 넘어 피난민이 되었다. 북한의 6.25 남침 때에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전쟁에 참여했다.
삼십대에 미국 장로교(Presbyterian Church USA) 선교회의 도움으로 유학을 마치고 전후 폐허된 한국에서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나라는 군정 아래 반공 지상주의와 경제발전 제일주의로 돌진하고 있었다. 장로교는 무용한 교리논쟁에 휩쓸려 교권쟁탈로 정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교수직을 유지하려면 진실을 외면하며 권력에 추종하여야만 했다. 그런 모순이 역겨워서 유학 중에 맛본 자유의 나라 미국을 향하여 이민 모험을 선택했다.
사십대에 아내와 함께 이남일녀를 대동하고 태평양을 건너서 미국인 장로교회(Emmanuel Presbyterian Church, Eighty Four, Pennsylvania) 목사가 되었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을 치르며 젊은이들을 징병했다. 반발하는 청년들은 자유방종(放縱) 히피(Hippie) 생활에 휘말렸다.
오십대에 대학(Ashland College, Ohio)으로 직장을 옮기어 종교학 교수가 되었다. 그 동안 연방정부가 이민쿼터 할당을 폐지함으로 한인동포가 홍수처럼 미국으로 몰려왔다. 그들을 돕는다고 법률을 공부하여 오하이오주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동포의 모임을 찾아서 이민교회(Hanmee Presbyterian Church, Itasca, Illinois) 목사가 되었다.
육십 대에 서울 영락교회 목사 청빙을 받고 한국으로 살림을 옮겼다. 한국 국민은 군부세력의 억압을 벗고 자유와 권리를 찾자는 시민운동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오만삼천 명의 신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일은 벅차면서 흔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반세기를 위생, 보건, 방역의 나라 미국에 살면서 면역을 잃어버린 육체가 거친 환경의 도전을 이기지 못하고 위축, 쇠퇴, 노화를 시작했다. 삼년 동안 병원에 드나들며 힘쓰던 사역을 끝내고 목회 일선에서 은퇴했다. 그 후 고국에 머물며 가벼운 일을 맡아 몇 대학에서 강의하고 해방 된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신학대학에서 구약신학을 한 차례 가르쳤다.
칠십대에 두 번째로 미국 이민이 되었다. 이번에는 전에 두고 갔던 성장한 자녀들을 찾아 왔다. 팔십대에 지난날의 삶을 떠올리며 두 말로 회고록(Over the Mountain, Across the Water, Western Washington University, 2000; 산 넘고 물 건너, 2002, 서울쿰란출판사; 태평양을 건너며, 2003, 서울쿰란출판사)을 출판했다.
그 후로는 내 전문과목인 히브리어 성경을 즐겨 읽으며 뉴스거리를 발견하면 간단한 수필을 써서 신문사에 보내곤 했다. 최근 몇 해 동안에는 칠십 년을 함께 살고 지난 1월 31일에 작고한 아내의 병구완에 주력해 왔다.
내일이면 생일잔치로 법석이든 삼십삼 명의 후손들이 어린이는 가정으로, 사업가는 상점으로, 회사원은 회사로, 교사는 학교로, 변호사는 로펌으로, 의사는 병원으로 각기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구십 고개 넘은 내가 홀로 남겠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힘내어 살아가고자 한다.
김윤국
은퇴목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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