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3.1절이다. 나는 또 어느 단체의 초청을 받아 기념식에 참석할 것이다. 그리고 애국가를 부르다 눈물을 흘릴 것이다.
나는 왜 애국가를 부르면 눈물이 나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그 이유를 잘 알 것 같은데도 설명을 할 수 없다. 아마 설명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일일 것이라 생각해왔기 때문인 것 같다.
한 번은 내가 눈물을 흘리며 애국가를 부르다 멈춰 있는데 근처에서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힐끔 바라보니 나보다도 칠팔 년은 더 연배로 보이는 팔십대 중반의 노인이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계셨다. 가슴에는 크고 작은 훈장들이 달려 있었고 옷은 약간 초라한 모습이었다. 식이 끝나고 나는 그에게 말을 붙이고자 하였으나 주책없이 내 눈에선 또 눈물이 났고 그 역시 별로 남과 섞이려는 것 같지 않아 그냥 헤어졌다. 좀 후회스럽다.
현재 80~90대 연배에 계신 분들은 참으로 ‘고난의 세대’이다. 왜정 때는 학도병으로 징용대로 끌려다녔고 해방 뒤에는 공비소탕과 폭력적인 사상투쟁, 6.25 땐 훈련도 제대로 못 받고 소모품으로 일선에 나가 싸워야 했던 분들이다. 그분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그 때 옆에서 우시던 분은 아마 나라에 대한 생각이 나보다 더 애틋하여 체면 불고하고 우신 것 같다.
필자의 할아버님은 1920년에 ‘청량리 밖 독립군 환영단’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된 적이 있다. 1년 동안 미결수로 고생하시던 중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변호인과 교우 몇 분이 급히 달려가서 업고 나오는데 다시 숨이 돌아오셔서 ‘세브란스(현 연세대병원)’로 모셔 갔다. 그러나 “회복될 희망이 없으니 댁으로 모셔가서 가족들 있는 데서 임종하시는 것이 좋겠다” 하여 집에 오셔서 4시간여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할아버님은 개화사상을 신봉하신 분으로서 구한 말 시대에 찍은 사진을 보면 양복과 흰나비 넥타이에 신사모를 쓰셨다. 왼쪽 조끼 주머니에서 은시계줄 늘어뜨리시고 개화장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던 분이었으나 기독교로 개종하신 뒤 모든 것을 버리렸다. 기독교 계통의 출판사인 시조사에서 말단 직원으로 일하시다가 위에 말한 사건으로 체포되어 일 년 만에 돌아가셨다.
할아버님보다 윗선에서 상해의 독립요인들과 직접 연락하며 일하시던 이동욱 선생 같은 분들은 다 살아 나오셨는데 왜 할아버님은 일 년 동안 미결수로 있다가 법에 정한 바 치료도 받지 못하고 감옥에서 돌아가셨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변호인이었던 분의 말씀에 의하면 할아버님은 입을 꽉 다무시고 심문에 응하지 않으셨다 했다. 체포되셨을 때의 건강은 매우 좋으셨다는데 옥중에 계실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번 3.1절 기념식에서 나는 울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정말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왜냐 하면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몇 번인가 눈물이 났기 때문이다.
이젠 우리 조국도 그런대로 살만한 나라가 되었고 자랑할 것도 많고 모국에 사는 분들을 불쌍히 여길 이유도 없게 된 마당에 내가 그렇게 눈물을 흘려야 할 까닭이 있는가. 울지 않을 것이다. 아니 울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어쩌면 또 주책없이….
권경모/ 실버 스프링,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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