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서서평 선교사(Elisabeth J. Shepping)가 내한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 오는 17일(토)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소재한 오원기념각에서 서서평 선교사의 희생적인 삶과 봉사를 기리는 기념식이 열린다.
‘서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이날 행사에서는 기독교 구호단체 ‘열방을섬기는사람들’의 양국주 대표가 서서평 평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를 발표할 예정이어서 더욱 관심이 몰리고 있다.
남다른 관심과 열정으로 한국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을 추적하는 작업을 벌여온 양 대표가 찾아낸 서서평 선교사는 처음에 ‘어려서 왕따를 경험하고 부모의 사랑의 받지 못했던’ 안스러운 여자였다.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집에서 내어쫓김을 당하고 슬프고 외로운 유년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소녀. 비오는 날 빗속에서 춤을 추는 게 차라리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어진 운명에 굴복하지 않았다.
1912년 2월20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그는 3월에 한국에 도착했다. 광주 제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며 나환자병원을 운영했다. 여러 지역을 돌며 조선 여인들의 참상을 목도하고는 그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주고자 이름을 지어주었고 각 마을 환자들을 돌봤다. 조선 최초의 여자신학교인 ‘이일학교(현 장로교 신학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했고, 여전도회 창설, 조선간호부회 창설, 현 장로교 내 전국여전도회 연합회의 전신인 부인조력회 설립 등 그의 활동은 왕성했다.
1933년 나환자 500여명을 광주에서 이끌고 조선 총독부까지 행진해 나병 환자의 정관시술 금지와 소록도 갱생원 설치 약속을 받아낸 일도 있는데 이후 그는 ‘나병 환자의 어머니’로 불리게 된다.
1년 뒤인 1934년 6월26일 53세를 일기로 서거한 그의 병명은 영양실조였다. 그때까지 그는 14명의 고아를 입양해 길렀고 38명의 과부들의 살림을 보살펴 주고 있었다. 서서평이 사망하자 동아일보는 사회면에 특집 기사를 게재했고 며칠 뒤에는 사설로 그의 삶을 조명했다. 광주시민들은 범 시민장에 준하는 추도식을 거행했다.
추천서에서 이동원 목사는 ‘작은 예수, 예수의 누이동생 같으신 분이 이 땅을 다녀간 것조차 몰랐던 것’을 반성한다. 그리고 “그녀의 유산으로 우린 영적 부묘의 마당에 서있고 그를 대하게 되는 순간 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양 대표도 “서서평이 이 땅의 사람들을 어떻게 섬겼는지 돌아보며 예수처럼 살기로 결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피력했다. 기념식에서는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녀을 축하하는 대통령 치사도 낭독된다.
‘바보야…’ 표지 글씨는 가수이자 국악인인 장사익 씨가 썼다.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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