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조그만 삽화 하나를 보았다. 뭔가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다시 들여다보면서 몇 가지 생각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다.
거래처 직원에게 부탁해서 하나를 가져다가 몇몇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들의 반응이 궁금했지만 아직까지는 모른다. 글로써 설명하다보면 그 사실감이 떨어진다. 황새가 개구리를 통째로 삼키고 있는 그림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그 광경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가 않다.
그런데 황새의 목에 넘어가던 개구리가 앞발을 빼어들어 황새의 목을 거꾸로 힘껏 조이고 있는 형상의 그림이다. 최후의 일각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결연하다. 그런데 그림속의 개구리를 인간이라고, 나 자신이라고 생각해서 보면 비현실적인 상황이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우리가 놓인 상황들이라는 게 만만한 게 하나도 없다. 치열한 비즈니스의 현장도, 공부와 시름하는 학생도, 힘을 직접 겨뤄야 하는 스포츠에도, 심지어는 평안해야 할 가정도, 교회도, 나 자신 속에 숨어있는 자아와 원초 자아(ID) 사이마저도 이런 상호관계가 있을 수 있다. 단순하게 ‘먹느냐 먹히느냐’로만 본다면 안 먹히기 위해서 필사의 투쟁을 벌이고 있는 그림속의 개구리가 애처롭다 못해 비장하다.
숭고한 개인이 모여 국가를 이룬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국가가 개인의 인간적인 권리를 광범위하게 제약한다.
국가 권력이라는 것들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들이 뒤따르고 있는가, 전쟁이 그 표본이다.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모두 민주주의를 더욱 드높이 내세운다.
그러는 가운데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는 ‘선거’를 치른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 있어야겠지만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너 죽고 나 살자’가 극에 달한다. 딱 이 삽화 수준이다. 심지어 총선 불출마를 하는 사람까지 쫓아다니면서 삼키겠다고 한다.
김무성의 불출마와 이정희의 불출마는 격이 달라도 한참이나 다르다. 그것이 안중에나 있을까. 이와는 달리 자신이 그림 속의 황새이고 강자라는 생각을 가진 이도 물론 있을 것이다. 이들이 소위 ‘1%’이다.
1%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1%라고 해서 다 그럴까? 그리고 1%들도 언젠가는 개구리의 처지였을 때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언제라도 그 1%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야 더 말해서 무엇하리오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 ‘상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거듭 곱씹어 볼 의미의 삽화가 아닌가,
상대방이 죽기 전에는 결코 포기할 수가 없는 살벌함과 치열함만이 지배하는 세상, 이게 진정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 세계일 수는 없다.
수 없이 먹히기만 했던 99%의 개구리들이 항상 잡아만 먹는 황새를 상대로 손목힘을 제대로 한번 써 보기를 이 봄에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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