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살의 조카가 고등학교에 다니기 위해 미국에 와서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최적의 사람이 집에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맑은 눈빛, 세상을 모르는 순진무구함, 싱그러운 생기와 스스로 알 수 없는 고민에 찬 존재가 경이로워 마치 맑은 매화꽃 가지가 피어있는 듯했다. 그 애가 나의 집에 도착한 날에는 실제로 사슴이 마당에 내려와 신기했다.
그림의 세계란 예민하여,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함께 사는 가에 영향을 받는다. 요즘에는 화가 친구인 린다 부부와 숲에서 몇 주 있다가 왔는데, 숲과 별이 그림에 나오고 있다.
몇 년 전, 린다는 시인과 결혼했다. 유심히 그들의 결혼생활을 관찰하는 데, 60이 다 된 이들이지만, 남편의 눈빛과 행동이 소년 같고, 시인이기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늘 기사도적인 남성으로 아내를 대하는 듯 보인다. 마치 중세시대 기사의 사랑을 하듯 아내를 귀히 여기고 찬미한다. 결혼 생활을 10년 넘게 했는데, 마치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서로를 대하는 소위 닭살 부부이다.
린다는 내가 미국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로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클래스에서 만났다.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갖느라 그림을 그리지 못했는데, 이 사람이 바보인가 천사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성이 고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나가 늘 의문이었다.
그러던 중 칼스테이트 롱비치의 문학부 교수인 시인 남편을 만나 올해 롱비치 미술대학의 회화과를 졸업했다. 그녀의 졸업 전시에 가서 그림을 보며, 한 화가의 꿈이 30여년을 걸려 실현되었다는 사실에 무척 감동했고, 막연한 재능이 확연한 화필로 전개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롱비치 주립 미대가 참 좋은 학교라는 생각도 들었다.
“착한 끝은 복이 있다”라는 옛말을 실감하며, 그렇게 착하고 고운 친구가 그 심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인을 만나 재능의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 그토록 기쁠 수가 없다. 시인남편을 만나 언어가 더 지성적이고 고상해졌다고 내가 놀리며, 하루에도 열두번 전화를 하는 남편이 쉽지 않겠다고 하면, 무관심한 것보다는 더 좋다고 하고, 남편이 늘 책만 읽고 있어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가끔 롱비치의 그녀의 집에 가서 잠을 자는데, 아침에 일어나 온 집안에 가득한 색채의 향연을 바라보며, 그녀가 끓여주는 커피를 마신다. 그곳엔 늘 롱비치의 바닷바람이 서늘하다.
그들 부부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을 바라보면, 바보처럼 선량한 사람들이 바보처럼 세상을 살아가고, 바보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게 아마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일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린다는 색채 감각이 좋은 몽환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테크닉은 수련 끝에 배울 수 있지만, 타고 나야만 하는 밝고 맑은 심성이 그림에 드러나, 오랜 수련 끝에 정말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근본을 지닌 화가라는 생각이 든다. 몽환적 성격으로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들을 그리기도 하는데, 꿈의 세계와 현실을 넘나드는 상상력이 특이하다.
현실의 반영이라기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무한한 마음의 상태에서 선뜻 드러나는 이미지들이 그림 앞에 한참 서있게 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녀의 작품이 6가와 맨해턴의 비전 화랑에 전시되고 있다.
<박혜숙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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