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속 노화(Slow Aging)’의 시대다. 서점가와 유튜브, 소셜미디어를 점령한 이 트렌드는 현대인의 새로운 신조어가 되었다. 혈당 스파이크를 막기 위해 채소를 먼저 먹고, 뇌를 쉬게 하려 도파민을 차단하며, 7시간 이상의 수면과 강도 높은 근력 운동을 꾸준히 한다.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병들고 고통받는 ‘유병 기간’을 최소화하고, 활력 넘치는 건강한 기간을 최대한 늘리려는 것이다. 한순간에 훅 가는 노화가 아니라, 아주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나이 드는 것. 이것이 현대인이 꿈꾸는 이상적인 생애다.
삶은 여러 단계의 매듭으로 이어져 있다. 수명이 늘어난다고 하면 고무줄처럼 인생의 모든 단계가 균일하게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기대 수명이 50세에서 100세로 두 배가 되었다고 해서, 어머니의 뱃속에 머무는 임신 기간이 열 달에서 스무 달로 늘어나지 않는다. 12세까지 지속되던 아동기가 24세까지 기계적으로 연장되는 것도 아니다. 대개 수명이 늘어날 때 그 증가분은 인생의 후반부, 즉 노년기에 덧붙여진다. 오래 살게 된 현대인이 ‘어떻게 늙을 것인가’에 집중하는 이유다.
그런데 ‘저속 노화’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인류의 삶은 지난 몇백만 년 동안 노년기뿐만 아니라, 태어나서 어른이 되기까지의 성장 속도 자체를 점점 늦춰왔다. 이를테면 ‘저속 노화’는 ‘저속 성장’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셈이다. 인간의 아기는 생후 6개월이 되어서야 첫 젖니가 나고, 두 돌이 지나야 20개의 젖니가 겨우 갖춰진다. 영구치 교체 과정은 더욱 지루하다. 6세 무렵 앞니가 빠지기 시작해 사랑니를 제외한 영구치가 다 자리 잡는 18세까지, 무려 12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린다. 이는 제대로 씹지도, 물어뜯지도 못하는 어설픈 무기를 들고 10년 넘게 포식자와 경쟁자 틈에서 버티는 위험한 전략이다. 인간은 왜 이렇게 느릿느릿 자라는 도박을 감행했을까?
인간의 이 ‘저속 성장’ 전략은 대략 6세 무렵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 시기까지 무럭무럭 자라던 아이는 갑자기 신체 성장에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몸집을 키우는 대신, 아이들은 섭취한 막대한 에너지를 보이지 않는 곳, 이미 성인 두뇌 크기의 90%에 육박하는 ‘뇌’에 쓰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이 시기에 복잡한 언어를 습득하고, 타인의 의도를 파악하며, 협동과 배신, 중재와 화해라는 고도의 사회적 기술을 훈련한다. 이가 빠진 호랑이는 굶어 죽지만, 이가 빠진 인간 아이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연습을 한다.
이러한 ‘느리게 자라기’의 유산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어진다. 저속 성장을 마친 인간은 자연스럽게 저속 인생을 산다. 그리고 현대 문명은 이 속도를 더 늦추고 있다. 불과 몇 세대 전만 해도 18세에 부모가 되고 36세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 생애 주기는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36세에 첫 아이를 낳는 것이 평균이 되었고, 72세는 되어야 손주를 볼까 말까 한다.
과거라면 ‘어르신’ 소리를 들었을 40~50대가 오늘날 ‘영포티(Young Forty)’라 불리며 청년 못지않은 외모와 감각을 유지하는 현상은 의학의 발달이나 피부 관리 덕분만은 아니다. 지난 200만 년동안 지속되어 온 ‘슬로우 라이프’라는 진화적인 트렌드가 영양 상태의 개선, 안전한 환경과 만난 결과다.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천천히 어른이 되고, 천천히 늙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냉정한 생물학적 현실이 공존한다. 생활 습관을 개선하고 마음을 젊게 먹어 20대 같은 40대를 산다 해도, 우리의 육체는 물리적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 치아는 닳고, 관절은 삐걱거리고, 눈은 침침해진다. 수명은 늘어났지만, 우리 몸을 구성하는 부품의 내구연한은 그만큼 획기적으로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속 노화’를 추구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신체의 노화, 이것이 현대 인류가 겪는 딜레마다.
결국 지금 유행하는 ‘저속 노화’는 웰빙 트렌드라는 유행을 따르려는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진화적으로 늘어난 수명과 늦춰진 생체 시계에 여전히 닳아 없어지는 육체가 적응할 수 있는 전략이다. 우리는 6살 아이가 뇌 쓰는 법을 익히기 위해 몸의 성장을 멈췄던 것처럼, 이제 100년이라는 긴 시간을 건강하게 건너기 위해 삶의 속도를 조절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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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UC 리버사이드 교수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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