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비전(tunnel vision)이라는 용어가 있다. 어두컴컴한 터널 안으로 들어갔을 때, 주위가 아닌 오직 저 멀리 정면의 빛만 보게 되는 일종의 시각장애를 일컫는 말로, 심리학적으로는 숲이 아닌 나무만 보는 인간의 제한된 시야와 사고를 설명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어느덧 옷차림이 한껏 가벼워지는 봄이 되니,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에 매여 진지하게 주위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일상을 이 짤막한 단어에 빗대어보게 된다.
언젠가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는다는 일을 가장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바로 삶의 소소한 감상과 감동의 소멸”이라는 당시 질문자의 대답이 크게 와 닿지 않던 그 때의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실제 길켠에 돋아나는 작은 풀꽃에도 쉬이 즐거워할 줄 알았던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이 현대인들의 터널비전 증상을 강화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해 말 개봉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링컨>에는 “아버지로서의 짐은 내가, 어머니로서의 짐은 당신이 감당해야 할 각자의 몫”이라는 링컨의 극중 대사가 등장한다.
세상 그 어느 관계보다도 가깝다는 가정 안에서조차 우리는 다른 가족구성원이 대신 짊어질 수 없는 각각의 역할과 책임을 맡은 채 살아가야 한다. 키에르케고르 역시 인간을 ‘신 앞에 선 단독자’라 단언하지 않았던가.
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이 감당해야 할 확실한 역할이 있다는 건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이처럼 모두를 외롭고 고독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현실 자각은 분명한 목표 중심적 삶의 태도와 사고를 강요하지만, 동시에 그밖에 삶에 대한 무관심을 종용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로써 자연스레 우리의 시야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인생의 많은 경험이 꼭 사람을 대범하고 용기 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공만큼 축적된 실패의 기억은 우리를 주저하고 또 고민하게 만든다. 이것 또한 우리로 하여금 쉽게 터널비전을 떨칠 수 없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터널비전은 분명 후천적 장애이다. 더욱이 확실한 삶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일시적 집중과 열심이 아닌, 가슴 가득한 두려움과 의심 혹은 회의로 인한 현실 회피가 동기라면 더욱 그렇다.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모험이다.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 삶의 공평함도 운운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없이 완벽해 보이는 누군가의 삶에도 누구나 고개를 저을만한 어려움은 있을 수 있으며, 그 모든 굴곡들이 연합함으로 인생이라는 악보가 비로소 다양한 선율로 채워지게 되는 건 아닐까.
루이제 린저는 자신의 소설 <삶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을 두렵게 하는 인생의 적나라한 진실 앞에서 도망치려는 주인공을 향해, 그 또한 삶의 일부이므로 현실을 대면하고 경험하려는 용기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외친다.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에 시달리다보면 우리는 손 끝 하나 닿지 못하는 터널 끝의 막연한 무언가를 기대하고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마침내 다다른 그곳은 실제 그토록 원하던 그 모습일까. 그리고 불확실하고 끝내 허망할지 모를 미지의 무언가를 쫓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우리의 일상이 허비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 후천적 터널비전이 의심된다면, 자의로건 타의로건 어둑해진 주위를 밝혀볼 일이다. 그간 외면해온 자신의 솔직한 현실과 대면하며, 겨우내 사라진 입맛을 하필 봄나물의 쌉쌀함으로 살리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곱씹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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