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이야기이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전공 관련 일을 하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 따라 미국에 왔다. 남편이 공부를 해야 했기에 친구는 그 뒷바라지하며 집에서 살림을 했다. 아이 둘을 미국생활에 적응시키느라 동분서주하며 매일 매일을 치열한 전투 같이 살았다.
그 사이 그녀의 꿈과 커리어는 고이 접어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되었고, 그 대가로 남편은 공부를 마치고 미국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착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로 자라났다. 그리고 생활이 안정되자, 그녀는 자신의 꿈을 다시 끄집어 내어 먼지를 닦아내고 접힌 주름을 곱게 펼쳐 이력서를 쓰게 된다.
미술을 전공한 터라 갤러리 등에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열정을 담아 이력서를 몇 군데 제출했다. 실력도 충분하고, 의욕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친구는 그러나 이력서를 제출한 곳 마다 면접 통지를 받지 못했다. 요즘처럼 기운 빠지면서 자신이 한심해 보이는 때가 없다고 슬퍼했다.
이력서를 쓰고 보니, 마지막 경력이 미국 오기 전 한국에서 일했던 경험이니, 이미 1990년대 말 일이다. 거의 15년을 쉰 자신에게 누가 일자리를 주겠느냐며 자포자기하는 모습이었다.
15년. 일하지 않은 15년.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고, 동료들과 점심을 먹지 않고,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하지 않은 15년. 직장생활을 하지 않은 그녀의 15년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녀에게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어여쁜 딸이 있고, 장난꾸러기이지만 공부 열심히 하고 가르치는 대로 밝게 자라준 씩씩한 아들이 있다.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을 예의를 갖췄고, 엄마가 해준 밥과 나눠준 사랑으로 착하고 곧게 자란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앞과 뒤에는 ‘엄마’라는 직업을 훌륭히 수행해 낸 친구가 있다. 그녀의 남편은 이제 미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신의 전공을 살리며 성공의 길에 올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값진 일은 무엇일까. 현 세대로 건강하게 활동하며, 인류를 잇는 다음 세대를 올바르게 키워내고 교육시켜 내는 일이다. 사회가 험하고 각박해 질수록, 가장 큰 바람은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자라서 우리 사회를 좀 더 밝고 희망적으로 바꿔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남편이 현 세대의 사회 일꾼으로 훌륭히 복무하도록 내조하고, 다음 세대를 이끌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일, 그 일에 친구는 전투적으로 참여했다.
그녀가 수행한‘엄마’‘가정주부’라는 직업은 미술관에서 일하는 어떤 큐레이터, 창작에 혼신을 다하는 어느 예술가 못지않게 값지고 귀한 일이다. 그녀의 이력서 맨 마지막 경력 혹은 현재 하고 있는 일은 ‘엄마’‘가정주부’라고 기재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어떻게 컸는지 그 결과를 이력서에 붙여서 자신의 경력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엄마’‘전업 가정주부’에서 사회의 다른 일로 복귀하고 싶은 수많은 친구들, 선배들, 그리고 후배들의 이력서를 상상해 본다. 그들의 이력서에는 자신이 내조한 남편의 이력과 자신이 키워낸 아이들의 사진과 활동내역이 같이 첨부되어야 마땅하다. 값진 성과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력서가 15년의 공백이 아닌 현재 경력으로 빽빽이 채워지기고 그것을 눈여겨보는 CEO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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