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 70주년 ‘백금혼식’올린 노진택·인화씨 부부
▶ ‘최고의 현모양처’ ‘세상에서 가장 가정적’ 서로 칭찬 딸 사업체 돕고 자원봉사 하느라 하루해가 너무 짧아
이 분들을 인터뷰한 것이 10년 전이다. 그때 결혼 60주년을 맞아 회혼례를 올리는 다복하고 아름다운 노부부를 취재하여 통판으로 2개면 가득히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또 한 번 초청장이 날아왔다. 70주년이란다. 그새 10년이 흘렀던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10년 동안 하나도 안 늙은 사람들이 있을까. 노인들은 세월이 더 빨리 보인다는데 도대체 두 분은 무슨 조화로 10년 동안 더 이뻐지셨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곱고 다정한 모습은 물론이요, 서로에 대한 사랑이 처음 가슴에 움튼 틴에이저 시절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수줍게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커플’. 매너 좋고 온화한 인품의 노택진 옹과 항상 웃는 얼굴에 귀여운 종달새같이 재치 넘치는 노인화 권사를 다시 만났다.
<정숙희 기자>
결혼 70주년은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석혼식’이라 하고, 미국에서는 ‘백금혼식’(Platinum Anniversary)이라고 한다. 그 이상은 이름도 없는 것이, 부부가 생존하여 결혼 80주년을 맞는 일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희귀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결혼 70주년 기념식조차 주위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아마 앞으로도 영영 없지 싶다. 과거에는 평균수명이 짧아 70년 이상 해로할 수가 없었고, 요즘에야 다들 만혼인데다 툭하면 몇 년 살고 헤어지니 결혼 70주년이란 말은 전설에나 등장할 단어가 돼버릴지도 모르겠다.
1943년 5월3일, 18세 동갑에 결혼하여 함께 미수(88세)에 이른 노택진·인화 부부는 그냥 살다보니 해로한 부부가 아니라, 70년 세월의 매순간 서로에게 진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온 행복한 부부다. 그 사랑이 넘쳐흘러 언제나 주변에 넉넉히 나누어온 두 사람에 대해 가족, 친지, 교우(나성영락교회)들은 ‘하나님이 짝 지워주신 가장 이상적인 남편과 아내의 모델’이라고 진심어린 칭찬과 존경을 표하고 있다.
“아내는 평생 최고의 현모양처였습니다” “남편은 세상에서 가장 가정적인 사람입니다”앞 다퉈 서로를 치켜세우는 두 사람은 일제 강점기 때 신의주에서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란 이웃사촌이었다. 어느 날 옆집에 놀러간 동생을 찾으러 나섰던 중학생(지금의 고교생) 노택진씨는 아리땁고 현숙한 처녀 장인화씨를 보고 그만 한 눈에 반해 버렸다. 당시는 연애하면 큰일 나던 시절, 들키면 문중의 죄인이요, 학교에서 퇴학당해 다음날로 군대에 끌려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위험도 사랑에 빠진 열일곱 총각의 불타는 마음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양쪽 집 동생들이 눈치껏 편지 심부름을 해준 덕에 아슬아슬한 연애가 이어졌고, 그 사랑은 1년4개월 후 결실을 맺었다. 경성제대에 합격한 노택진씨가 결혼시켜 주지 않으면 서울로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 이미 둘 사이를 눈치 챈 양가에서는 서둘러 약혼과 결혼을 치러주었다고 한다.
“당시에도 열여덟이면 이른 결혼이었지만 대동아 전쟁이 막바지여서 다들 불안하던 시절이었죠. 남자들은 학도병으로, 여자들은 정신대로 언제 끌려갈지 모르던 때라 손주라도 빨리 보고픈 집안에서는 일찍 혼인을 시켰답니다”너무 어려서 결혼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일체 안하고 “내가 꼭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줘야겠다고 결심했다”는 노택진 옹은 그 결심이 지금까지 진행형이라고 말한다. 그 옛날 골프장 회원권을 가졌던 특권층이었지만 아내와 자녀들과 보내는 시간을 희생할 수 없어서 한 번도 골프채를 잡아본 일이 없다는 그는 사업상 기생집에서 술 마시는 일이 가장 괴로웠다고 고백하는, 그 세대 한국 남자로서는 정말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남편이다.
서울 의과대학 1학년 때 해방을 맞자 전공을 바꿔 법대를 졸업한 그는 재무부에 취직해 59년부터 세계 각국으로 출장 다니면서 열린 마음과 매너를 몸에 익혔고, 어디를 가도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며 사랑을 고백해 왔다. 장녀 현숙씨는 “아버지는 최근에도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너희 엄마와 결혼한 것’이라고 하실 정도로 두 분이 서로 너무 사랑하신다”고 감격스러워했다.
현숙씨에 따르면 어머니 노인화씨는 ‘한국의 마사 스튜어트’였다. 멋이고 맛이고 디자인이고 없이 먹고 살기 힘들었던 1950~60년대의 한국에서 얼마나 집안을 예쁘고 정성스럽게 꾸몄는지 친구들이 놀러오면 부러워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헝겊 귀하던 시절에 쪼가리 천들로 아플리케를 만들어 여름이면 초록 잎 커튼으로, 가을엔 낙엽무늬 커튼으로 바꿔달고 나뭇가지며 열매를 매달기도 했었다니 지금 들어도 놀라운 인테리어 감각이다.
“손재주와 창의력이 너무나 특별하셔서 집안 장식과 소품, 우리들 옷, 음식 하나하나 모두 사랑의 터치가 깃든 예술품 같았습니다. 저의 생일에는 매년 다른 케익을 구워주셨고, 떡도 케익처럼 층층 모양내 만들어주셨죠. 얼음을 여러 색으로 물들여 띄우거나 속에 과일이나 꽃잎을 넣어서 얼리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어요. 지금 같으면 그 수많은 아이디어들로 홈 매거진을 만들어도 됐을 텐데, 사진으로라도 남기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지금도 늘 부지런히 움직이며 일한다는 인화씨는 잉꼬부부로 70년 지내온 비결의 첫째로 ‘자녀 중심’의 가정을 꾸려온 것을 꼽는다.
“가끔 의견충돌도 있고 화날 때도 있었죠. 하지만 아이들에게 안 좋겠다 싶으면 무조건 다 내려놓았어요. 그래서 가정엔 아이가 있어야 합니다”그리고 사랑과 감사, 또한 규칙적이고 바쁜 생활이 노부부의 건강 지킴이다. 노택진 옹은 아직도 주 5일 큰 딸의 사업체에 출근하며 재정업무를 맡고 있고, 아내 인화씨는 자원봉사와 합창단 활동으로 젊은 사람들보다 더 바쁘게 산다.
“너무 바빠요.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 시간이 없어서 다 못하지. 집에 있어도 편지 쓰고 카드 보내고 안부전화 챙기느라 하루해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지요”5명의 시누이 부부, 2명의 시동생 부부, 수십명의 조카들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생일카드를 손으로 직접 써서 보내기를 70년 동안 해왔다는 노 여사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자 “가끔 하면 잊어버리지만 한 달에 몇 개씩 보내는 사람은 오히려 잘 기억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모두들 내가 보낸 카드를 보관하고 있대요. 시누이들이 그걸로 책을 만들겠다는 얘기도 하지요. 카드마다 시시콜콜 옛날 얘기를 써서 보내주니까 그렇게들 좋아 한답니다”노씨 부부가 미국으로 이민 온 것은 1970년. 미국을 여러 번 드나들면서 살기 좋다고 생각하던 차에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이민을 결심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자리 잡은 후 5년간 모텔을 운영하다가 아이스크림 전문 레스토랑을 10년간 운영했고 86년 은퇴해 LA로 내려왔다.
그동안 4남매 모두 UC버클리 등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며 자리 잡았고 슬하에 8명의 손자손녀, 4명의 증손주를 보았다. 장남 노현철씨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건축회사 은퇴 후 식당을 운영하고 있고, 장녀 현숙씨는 주류사회에서 유명한 가구점 ‘블루 프린트’(Blue Print)의 사장, 차남 현범씨는 공인회계사, 막내딸 현원씨는 피닉스에서 부동산업으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60주년 회혼례는 장녀 현숙씨의 선셋힐스 자택에서 일가친척이 모두 모인 가운데 사모관대 혼례복을 입고 성대하게 치렀으나 70주년 백금혼식은 지난 11일 옥스포드 팰리스 호텔에서 가까운 가족친지만 100여명을 초청,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아름답고 따사로운 파티를 가졌다.
지난 3월 운전면허 갱신시험에 합격, 93세까지 5년 더 운전하게 됐다며 함박웃음을 짓는 노택진 옹 옆에서 아내 인화씨는 “결혼 80주년 인터뷰는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며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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