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슐라르를 읽다가 갑자기 부엌으로 가서
김장김치 한 포기를 썰지도 않고 죽죽 찢어 서서 먹는다
입안에 가득 한겨울 시린 배추밭이 들어온다
새파란 무청 줄지어선 무밭도 들어오고
붉은 고추밭도 총총한 마늘밭도 다들 살아서 들어온다
어쩌구 저쩌구 고매한 정신에 밑줄 따라 그어가며
한량없이 쫓아가던 나의 정신에 느글거리던 이론에
과감히 고춧가루를 뿌리는 이 한밤의 역설
허구에 시달리며 또한 허구에 목마른 나는
이 긴긴 동짓달 하룻밤을 아름다운 사색으로 채우려 했건만
나의 정직한 식욕은 실체를 원했던 것이다
시뻘건 고춧가루와 노오란 마늘과 시퍼런 파와
청각과 가지가지 재료들이
망상과 그리움과 고단함과 분노와 욕망과 회환과 무료함과 간절함과
익어가는 여인의 허연 장딴지 같은 배추의 속살에 범벅이 되어
불현 듯 아름다워지는 나의 크리스마스 저녁
바슐라르 선생
침을 꿀꺽 삼키며 날 쳐다보고 있다.
-노준옥(‘시와 사상’ 등단) ‘김치 크리스마스’ 전문
바슐라르를 읽던 화자가 김장김치를 쭉쭉 찢어 먹는다. 김치의 싱싱한 맛을 따라 줄기줄기 떠오르는 생의 실체들. 실존의 허기를 단숨에 채워주는 김치는 또 하나의 망상이 아닐까. 느글거리는 이론에 고춧가루를 뿌리듯 생기를 되찾은 욕망은 칼칼한 눈을 들어 실상 같은 허상을 노래한다. 대체 영혼은 무엇이고 고매한 정신이란 무엇인가. 상업화된 크리스마스는 거리마다 형형색색 부유하고 실존에 대한 인간의 물음은 이 밤도 끝이 없다.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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