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에 지치니 속히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 드라이브 길에 차를 주차하고 곧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얼굴에 와 닿는 실내 공기에 안도의 숨이 절로 나온다.
“아, 시원해.”
6월 들어서 습하고 더운 날씨가 이어졌다. 99도지만 체감은 105도쯤 될 것이라고 방송국에서는 계속 뉴스를 쏟아내 심적으로 더 덥게 만든다. 마땅히 날씨에 관한 뉴스를 전달해야 할 방송국이지만 이럴 때는 날씨 뉴스는 좀 덜 보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틀랜타나 샬롯츠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숲이 많은 워싱턴은 그 울창한 숲으로 인해 후덥지근하고 습한 여름 날씨로 유명하다. 지금부터 9월까지 이런 날씨가 워싱턴을 지배하리라 생각하니 벌써 지친다.
냉수 한 잔을 들고 거실 소파에 편한 자세로 앉으니 강물이 흐르는 동양화가 새삼 눈에 들어온다. 내 눈앞에 전개된 한가한 풍경에 밖에서 들뜬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음을 느끼며 액자 속의 그림을 주시한다.
오래전에 선물 받은 동양화이다.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니 자연히 그림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이 동양화는 누구의 그림인지도 모른 채 우리 집 거실 한 면을 가로로 길게 차지하고 있다. 물론 낙관은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 가로로 네 글자로 제목이 쓰여있고 그 옆에 세로로 일곱 줄의 한시가 그보다 조금 작게 쓰여있다. 마지막 줄은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의 이름인 듯 끝에 도장이 두 개 붉게 찍혀 있다. 그러니 시는 여섯 줄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동네 중국인에게 물어보았지만, 미국에 온 지 오래되어서인지 아니면 원체 큰 중국의 어느 부족의 글이라 모르는 탓인지 떠듬떠듬 읽다가 겸연쩍은 얼굴로 나를 보기에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무슨 내용일까 가끔은 궁금한 채로 어느새 삼십여 년이 지났다. 하지만 제목의 첫 자가 ‘귀고리 이 珥’자이고 마지막이 ‘즐거울 락樂’ 이어서 그림에 비추어 생각하니 귀를 후비는 즐거움에 대해 쓴 것으로 나름 짐작하며 그림을 본다.
그림에는 솔잎 무성한 늙은 소나무가 한 편에 서 있고 그 가운데에 한 줄 구름이 희미하게 사물을 지우고 있다. 그 아래 망건을 쓴 사람이 소나무 둥치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자세히 보니 지체가 높은 관료인 듯 긴 얼굴에 짙은 코 밑 팔자 수염과 턱수염이 풍채 좋은 기상을 풍긴다. 입고 있는 도포의 목 둘레와 소매는 다른 색으로 수놓은 고급스러운 옷차림이고 바지 끝으로 맨발 하나가 내보이는 데 무릎에 놓인 기름한 두 손만큼 상당히 수려하다. 생전 더러운 것을 밟지 않은 발이라는 인상이 든다. 그 옆에 노인의 앉은키만 한 크기의 동자 童子가 서서 왼손은 그 관료의 어깨에 얹고 오른손은 귀 후비개를 들고 있다. 귀 후비개의 한쪽 끝은 노인의 귀에 닿고 또 다른 끝은 동자의 손을 지나 있으니 지금과는 달리 귀 후비개가 꽤 길다. 문득 박물관에 갔을 때 보았던 고대인의 일상품들이 생각났다. 현대 사회에서 사용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커서 볼 때마다 저것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의문이 있었는데 이 그림의 귀 후비개도 예외가 아니다. 쇠붙이든 나무든 그 당시는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 사용했으니 이 정도로 만들기까지는 아마 도를 닦는 정성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솔 향 솔솔 날리는 편편한 산 중턱에서 절벽 아래 첩첩이 놓인 산줄기를 휘돌아 아득히 흐르는 강과 오수에 든 영감의 편안한 모습에 내 번잡한 마음이 가라앉는다. 나도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그림 속의 미풍을 내 맨발에 느끼며 나른히 오수에 잠긴다. 누가 알랴, 혹시 꿈속에 그 동자가 나타나서 내 귀를 후비고 나도 그 즐거움을 맛보게 될지. 영감을 만나면 그림 속 한시의 뜻을 물으리라. 궁금했던 세월만큼 무릎을 탁 칠 멋진 한시이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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