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영화에서 본 장면이 떠오른다. 군복을 입은 청년이 굳게 핀 손으로 경례 할 때 절도 있게 ‘충성’을 외치는 늠름한 모습이다.
충과 의를 실천한 사람을 예를 든다면 구한말에 덕유산 산악지대에서 치열한 항전과 혁혁한 전과를 올린 문태서 장군이 있다. 1905년 일제 침략자들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자 면암 최익현 선생을 방문하여 모병기의를 밀의하고 귀향하여 60여명을 모아 창의, 신출귀몰한 작전을 전개하여 왜군을 무찌르고 친일 분자를 척결해서 가난한 백성들을 보호하였으므로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의기와 희생정신은 애국애족과 조국근대화 사상에 싹을 틔웠다고 한다.
이처럼 병역의 의무에서는 충성이요, 임금과 신하는 신의가 요구된다. 다시 말해 충성은 정성을 다하는 것이고 신의는 믿음과 의리를 지킨다는 뜻이다.
지난 주 동양정신문화연구회에서 배운 내용에 의하면 공자의 일관된 가르침은 충(忠)과 서(恕)로, 충은 ‘인간의 내적인 충실’을 말하며 서는 ‘인간 상호간의 고려’라는 것이다. 충과 서는 둘인 것 같으나 실제로는 하나라는 것이다. 서를 쉽게 설명하면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하는지 자신을 그 입장에 세워놓고 보면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충은 비잉(Being)이고 서는 두잉(Doing)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깊은 차원의 수직적 사랑이 횡적인 이웃사랑으로 연결돼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이웃사랑도 있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대접하라” 다시 말하면 본인이 싫어하는 것을 남한테도 하지 말라는 말이다. 자기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이기주의의 발로에서 나온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답이 나오는데 본인만 생각하기에 개념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기본적인 상식선에서 무슨 일이든 처리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하고도 뻔뻔하게 하는 것은 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수레에 가득 채우면 말없이 겸손해진다.
다산 정약용님도 충보다는 서가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 인간관계에서도 서에서 충이 나온다. 결국에는 공자의 말씀인 서와 충은 기독교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인간이 자연과 우주 속에서 조화로움과 도덕적인 상식과 감정을 나누고 주고받으며 지혜롭게 살아간다면 아름다운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살아있는 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지 말고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스티븐 코비의 말을 명심해야겠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