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야, 나 어젯밤 ‘아나벨 리(Annabel Lee)’를 읽고 눈이 퉁퉁 붓게 울었어.” 철없이 문학소녀 폼 잡던 시절, 내 짝 명자가 했던 소리다. 질소냐 하고 나도 따라 읽었다. 그리고 아나벨 리가 부러웠다. 눈 아프게, 가슴 저리게 부러웠다.
“사람이라는 존재, 누구나 딱 한 번 이 세상을 살고 가는 존재인데, 아나벨처럼 그렇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늘의 천사마저 질투할 그런 사랑을 한 남자로부터 받을 수 있다면 아무리 어린 나이에 죽었다 해도 그건 살만한 인생이었다” 싶었던 거다. 그리고 연애 한번 해 보지 못한 주제에, 아니 연애는 커녕 남친 한번 사귀어 본 적 없는 존재이면서 그래도 꿈은 꾸었다. “나도 아나벨 같은 사랑을 하고, 또 그런 사랑을 나의 남자한테서 받을 거야. 온 세상이 부러워하는 그런 사랑으로 똘똘 뭉쳐 살 거야” 하는 철없는 꿈을. 당시만 해도 에드가 알란 포(Edgar Allan Poe)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왜 그런 시를 썼는지는 몰랐으니까.
앞으로 살 날이 지금껏 산 날보다 눈에 띄게 줄어든 오늘. 다시 한 번 포의 아나벨 리를 읽어본다. 그와 25세에 죽은 그의 부인 버지니아를 그려본다. 26세의 포는 열 세 살짜리 고모의 딸인 사촌 동생 버지니아와 결혼했다. 포를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둘 사이가 부부관계라기 보다는 오빠 동생 같은 사이로 버지니아가 죽을 때까지 처녀였다고 우기는 학자조차 있을 정도다. 하지만 결혼 초에는 어린 버지니아를 다치지 않았다 해도 16세가 된 후부터 폐병에 걸릴 때 까지 둘은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인 듯하다.
포는 ‘부인의 아름다움에 거의 광적’이었나보다. 친구에게 “살아있는 인간 중 나의 작은 처 만큼 아름다운 여자는 본 적이 없네” 라고 썼으니. 13살짜리 소녀 아이가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버지니아가 25세에 죽었다면 아직도 어리고 젊다. 아니 한창 아름다울 나이다. 게다가 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버지니아는 라벤더 (보라색의 일종) 색의 눈에 검은 머리였다고 한다. 세기의 미인으로 알려진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눈과 머리색이 바로 그랬다. 또한, 그녀는 얼굴 표정이 유달리 풍부하고, 자태 역시 아름다웠다고 한다. 표정이 풍부한 얼굴이라면 글 쓰는 포를 더 사로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버지니아 역시 포를 좋아하고 숭배하다시피 했나 보다. 26세의 성인(?) 남자가 13살짜리 어린 여자 꼬시기야 누워 떡 먹기(?)였을 가능성은 클 수 있겠지. 하여튼 버지니아는 포가 작업하는 동안 종종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종이, 연필도 챙기고 쓴 원고를 정리하며 도왔다고 한다.
그녀 또한 시를 좋아했나 보다. 죽기 1년 전 “당신과 영원히 거닐고 싶어요,” 하는 시를 포에게 써 주었다. 그 시에는 “내게 오두막을 하나 주세요,” 하는 문구가 있다. 포는 그녀를 위해 뉴욕의 작은 오두막으로 이사했고 버지니아는 거기서 죽었다.
“아내를 잃은 포는 한 시간이건, 하루건, 일주일이건 일 년이건 사는 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에겐 아내가 전부였으니까요.” 포에 대한 친구의 설명이다.
“추운 겨울밤, 야심한 시간이면 눈 덮히고 꽁꽁 언 채로 아내의 무덤 곁에 앉아있는 그를 자주 볼 수 있었지요.” 또 다른 친구가 썼다. 생전에 알려진 버지니아의 사진은 없고 사후 죽은 얼굴을 그린 수채화 하나가 남아있다. 포가 태어난 지 66년 되는 1875년 뉴욕에서 볼티모어의 포 곁으로 이장되었다.
어쩌면 외로운 포를 한 인간으로, 남자로 이해하고 사랑했던 사람은 아나벨 리로 표현된 버지니아 클렘 뿐이 아니었을까? 아픈 마음으로 살았던 둘, 편히 쉬기를…. 내가 철없고 무식해도 너무했다. 사랑의 ‘ㅅ’자도 깨닫기 전 스러지고 말 신세면서 감히 아나벨을 꿈꾸고 넘보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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