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20년 만에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이라는 대서특필의 기사를 본다. 요즘은 북한의 인권탄압을 고발하느라 너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한다. 북한이 인권을 완전히 무시한 지는 50년이 넘었다는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 아닌가. 이주헌 박사와 이계월 선교사는 인권 때문에 하바로프스크에 가신 것이 아니다. 물론 그분들이 인권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그 보호를 위하여 용감하셨다는 것은 말할 여지가 없다.
나는 이주헌 선교사님의 성품을 너무도 잘 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선교자임을 더욱 존경하였다. 무서움을 모르고 용감하고, 주님의 말씀을 철저히 이행하였든 순교자로서 주님의 뜻을 받들어 하는 사역을 위해서는 그들에게 무서움이 없었다.
나는 늘 이주헌 선교사님(나는 늘 그분을 이주헌 대위라고 불렀다)이 바른 말을 거침없이 하는 분으로 존경해왔었다. 정의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은 분이다.
처음에 하바로프스크로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 때는 러시아가 철저한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 사회로 전화되어 가던 혼란한 사회였다. 바른 말만 하신 그분이 여간 염려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주헌대위의 용기를 알기 때문에 속으로 그럴 만 하신 분이라고 여겼다. 그 소식을 전해준 레나들빌에 계신 이주헌 선교사의 대학동기이신 문영식 선배에게 나는 별로 놀랍지 않다고 말했다. 구호품 몇 점을 보내 드렸다.
나는 순교자를 흠모한다. 나는 그들의 거대한 용기에 내 자신이 너무 작다는 것을 늘 느끼지만 그들의 용기를 배우고 배우면 나도 좀 더 용기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산다.
기독교 순교자는 예수의 길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이다. 예수의 제자들을 시작해서 수많은 순교자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늘 멀리 있는 역사적 인물로 막연히 존경만 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느냐?’ 하는 질문에 ‘예스와 노’의 선택 중 ‘예스’를 택하는 용기였다.
그러나 그 간단한 ‘예스’는 그들의 생명을 같이 하는 것이다. 내 가까이에 포리카프 같고 사도 바울처럼 용감한 선교자가 있었으며 그들이 순교하였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순교하였다 하는 것은 금으로도 살 수 없는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 것도 내가 그럴만한 분으로 믿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누구나 “러시아 땅에 떨어진 두 밀알” (김동수 교수 편집)을 읽으시면 그들의 용기를 확연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대한민국 인권상’ 보다 훨씬 고귀한 상을 이미 주님이 하사 하셨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 그들은 값진 소금이요 빛이라는 것 말할 나위 없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