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루소 ‘집시의 잠’
아모리 아트페어를 보기 위해 방문한 뉴욕엔 눈보라가 치고 있었고, 흰 눈이 쌓인 거리와 나무들이 장관이었다. 뉴욕의 거리에서 느끼는 활기와 좋은 그림들 덕분에 마음의 빛이 환히 켜져서 봄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에 한번은 방문하여 뮤지엄의 좋은 그림들을 다시 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림이라는 게 정신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인데, 오랜 동안 내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다른 세계에 잠시 몸을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운이 샘솟는 것 같았고, 돌아와서 다시 시작한 붓질에 선명한 힘과 열정이 가해지는 듯하다.
아모리 아트페어는 지난겨울 LA 아트페어에서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작품들로 인해 실망했던 것과 달리 ‘역시 뉴욕이구나’ 감탄할 정도로 규모와 작품성이 강하다고 느꼈지만, 역시 아트페어라는 작품전의 성격상 전시된 수많은 그림들 앞에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보다는 물질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깊은 사고보다는 빠르고 가벼운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의식을 반영하듯, 잘 포장되고 세련되어 있지만 공허하고 얕은, 소파나 가구 같은 인테리어의 일부로 전락한 예술품들이 과연 현대인이 느끼는 존재의 갈증을 채워줄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가치 없는 물건들로 가득 채워진 공간 속에서 차라리 눈이 가는 건 눈보라 추위 속에 한껏 멋진 의상을 차려입고 축제에 온듯 바글거리는 뉴요커들의 모습이었다. 캘리포니아 사람들이 좋은 날씨 덕에 편안해 보인다면, 어디를 가나 뉴요커들은 생각이 깊어 보이고 중후해 보이는 듯해 흥미 있게 사람들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다음날엔 현대미술관 MOMA에 갔다. 역시 MOMA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가슴을 뛰게 하고 경탄을 느끼게 하는 마티스의 중요한 작품들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아트페어의 수많은 작품들 전부보다도 단 한장의 명화가 나의 영혼을 쉬게 하고, 다시 삶에 용기를 주고, 자칫 회의에 빠질 수도 있는 예술 세계에서의 모든 의심을 거두어가고, 찬란하고 밝고 영원한 정신이 한장의 캔버스 위에 시각 조형으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을 바라볼 때의 감동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가장 오래된 정신이 마치 방금 그린 것처럼 새로운 명화의 비밀은 무엇일까 자꾸 생각해보게 된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있었다. 뒤뷔페의 작업을 보았고 피카소의 작업을 보았다.
그리고 언제나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멋진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루소의 집시 그림을 다시 보았다. 나의 삶이 집도 절도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스튜디오를 찾아 늘 떠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일까. 나의 영혼이 영원한 잠과 태고의 시간을 꿈꾸고 있기 때문인가… 달빛 아래 사자의 곁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고, 비파 같이 생긴 악기가 하나 보이고, 색동 빛이 나는 의상을 입은 집시의 그림에 늘 깊은 감동을 받곤 한다.
가장 좋은 그림들은 신화의 상태를 구현하고 있다고 보는데, 이 그림이야 말로 영원한 동경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와 현재가 함께 있고, 동물과 인간이 함께 있고, 명상적 고요함이 곁들인 달빛 아래 그토록 편안해 보이는 집시의 잠이 몽환적 아름다움으로 의식의 저 깊은 심층을 깨운다.
꿈, 신화, 자연 그리고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충만한 헐벗은 삶의 무상한 아름다움이 하나의 완전한 우주처럼 전개되어 있는 한 장의 그림 앞에서 ‘예술이란 게 저런 걸 거야…’ 라고 느끼며, 현실과 꿈 사이에 번쩍 전 존재를 깨우는, 가장 몽환적인데 가장 선명한, 가장 인간적이며 또한 초월된 정신의 상태. 정령과 인간, 우주와 자연의 한 가운데에서 철학도 종교도 아닌 아름다움으로 꽃피운 한 장의 감동을 느끼는 것이었다.
다시 LA에 돌아와 화실에 쌓인 그림들을 바라보며 새로운 시선과 정신으로 붓을 들기시작했다. 신선한 충격은 오래가지 않지만, 집중할 수만 있다면, 어떤 우연이 새로운 그림의 전개를 가능케 하지 않을까 희망하며 그토록 오래 그림을 그려왔건만 늘 막막하기만 한 캔버스를 한참동안 바라보고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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