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에비테른의 초상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모딜리아니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젊은 나이에 자살한 반 고흐의 작품은 작품 세계의 절정에 이른 듯하여 그가 오래 살았으면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하는 상상을 별로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에 비해, 서른여섯의 나이로 요절한 모딜리아니의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작품 세계가 막 꽃피기 시작했을 때 요절한 듯하여 오래 살았으면 얼마나 더 멋진 작품을 남겼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가 갈망했던 작품의 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미완성의 화가가 모딜리아니이다.
그가 남긴 몇 점의 두상 조각들을 보면, 고전적이고 근원적인 조형을 추구했다는 것을 감각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고전을 사랑했고, 특히 단테의 신곡을 늘 읊조렸다는 자존심 강한 그가 겪은 파리에서의 짧은 생애는 가난과 병고, 마약으로 피폐했는데, 그가 그린 초상화 또한 음울하고 허약하며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인간으로 가득하다.
LA카운티 미술관에서 그의 초상화 한 점을 보고 마치 금방 구운 빵처럼 신선한 색조, 100년 전에 그린 그림이 마치 어제 그린 것처럼 선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 한 적이 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닌 초상화와 여인의 누드를 그린 화가로만 알고 별 관심이 없던 모딜리아니를 좋아하게 된 것은 나의 제자가 특히 모딜리아니를 좋아하여 그의 작품을 모사하기 시작하면서였다. 그녀가 구한 모딜리아니 책을 들여다보며, 그의 인물화를 좀 더 관심있게 바라보면서 참 좋은 화가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오랜 동안 추상화를 그리며 언젠가는 인물화를 그려야지… 하고 생각해왔기 때문인가. 그의 인물화를 보며 인물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결국 화가는 인간을, 인간의 내면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동안 나의 제자는 모딜리아니에 더욱 심취하여 벌써 네 장째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를 카피해오고 있다. 특이한 것은, 그녀도 알지 못하는 채로 모사한 네 장의 초상화가 모두 잔 에비테른의 초상화라는 점이다.
잔 에비테른은 모딜리아니가 결핵성 뇌막염으로 죽은 이틀만에 임신한 채 투신자살한 모딜리아니의 젊은 아내이다. 조각처럼 잘 생긴 모딜리아니는 수많은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한데, 잔 에비테른은 그의 예술을 탁월한 세계로 인도한 진정한 뮤즈이자 마지막 연인이었다. 다른 여인의 초상화가 음울하고 관능적인데 비해 잔 에비테른을 사랑하면서 마치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만난 듯 새로운 경지의 예술이 탄생하기 시작한다.
음울한 무관심으로 인물의 특성을 그리던 그가 지고하고 무한한 사랑으로 영혼이 열린 듯 아름답고 깊고 밝으며 무한한 사랑이 시공간으로 표현된,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이전의 초상화와는 천지 차이가 나듯 새로운 세계이다. 마치 처음으로 사람의 얼굴을 사랑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듯 그 그림들은 빛이 나는데, 그동안 그리지 않던 동공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마치 그가 사랑하고 그를 사랑한 연인의 영혼을 깊이 꿰뚫어보는 듯하다.
그런 아내를 두고 그토록 일찍 떠나야했던 애처로운 연인들의 사랑이 안타깝고, 마침내 빛을 그리기 시작한 그의 초상화가 그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는 사실은 그림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상실인지!그의 화집을 밤늦도록 들여다보며 잔의 초상이 빠진 그의 그림 전체가 파리의 우울을 연상시키는 음울한 인간들로 가득 차있다고 느끼는 것은 과장된 생각일까. 잔의 초상들이 마지막 몇 점이나마 그려졌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어둠에서 빛으로, 단절에서 사랑으로, 육체에서 마음으로, 무한하고 아름다운 잔의 초상은 깜짝 놀랄만한 생명력으로 영원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비참했던 연인들의 사랑이 가장 드높고 영원한 예술의 상태로 인류에게 큰 선물로 남겨져있다.
열정은 있으나 무심하다고 늘 친구들에게 불평을 듣는 내가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그릴 수 있을까? 잔 에비테른의 아름다운 초상화 몇 점이 일깨우는 그 무엇이, 진정한 사랑과 관심으로 눈을 뜬 사람만이 사람을 그릴 수 있다는, 귀한 지침이 될 것 같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