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열풍’-. 최근 한국 문화가의 키워드는 이 네 글자로 정의될 수 있다고 한다. 세시봉 시대라고 했나. 60~70년대 통기타 가수, 청년문화가 새삼 주목을 받는다.
50~60년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6.25를 다루고, 월남전에, 서독광부 이야기도 나온다. 그 ‘국제시장’이란 영화에 1000만이 훨씬 넘는 관객이 몰려든 것이다. 복고열풍은 하나의 현상이 된 느낌이다.
‘조훈현과 조치훈’- 한국이 낳은 현대 바둑의 두 거장이다. 이들의 만남도 그렇다. 한국바둑 70년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세월을 상징하는 인물로 이 두 거장이 뽑혔다. 이 둘 간의 열네 번째 공식대국이 벌어진 것이다.
100년만에, 아니 200년만에 한 명 정도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다. 조훈현을 두고 일본의 기계가 일찍이 내린 평가다. 조치훈에 대한 기대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일찍부터 신동으로 알려진 이 둘은 60년대 초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유학을 떠난다.
당시 일본은 말 그대로 현대바둑의 종주국. 모든게 열악했던 한국과 비해 프로기사의 실력차이는 엄청났다. 그런 상황에서도 한국에서 온 두 신동에 대한 기대는 이처럼 높았던 것이다.
이 둘의 여정은 1970년을 기점으로 크게 갈린다. 조훈현은 군복무를 위해 귀국해야 했다. 조치훈에게는 운이 따랐다. 바둑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병무면제혜택이 주어진 것.
그리고 10년. 기대대로 조훈현은 한국바둑을 석권한다. 같은 해 조치훈은 일본의 명인위에 오른다. 그 승리에 대한민국이 뒤집어졌다. 조치훈 개인승리라기 보다 일본에 대한 한국의 승리로 받아들이면서 조치훈에게 훈장이 수여됐다그리고 서둘러 마련 된 자리가 조훈현과의 기념대국이었다. 두 천재의 공식적인 만남은 이런 들뜬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두 차례 대국에서 조훈현은 모두 패배, 깊은 내상을 입는다. 조훈현은 깊은 숨고르기에 들어간다.
1988년. 이 두 천재의 여정은 또 다른 갈림길을 맞는다. 1인자였던 조치훈은 무관이 되다시피 했다. 그리고 마침 열린 최초의 세계 바둑대회 응창기배에 출전하지만 중도탈락하고 만다.
조훈현은 세계의 강호들을 모조리 격파, 마침내 명실상부한 세계바둑의 제왕으로 떠오른다. 그렇다고 조치훈이 그대로 주저앉은 것이 아니다. 또 다시 집념을 불태우면서 90년대에 기성 등 3대 타이틀을 잇달아 석권하는 등 대기록을 세운다.
90년대 들어 세계바둑계에는 1급 경계령이 내려진다. ‘공한증’(恐韓症)이다. 변방에 있던 한국바둑이 중원을 장악, 그 위세에 일본과 중국은 숨죽여 지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조치훈으로 바둑에 대한 관심이 폭발됐다. 조훈현으로 한국바둑은 세계를 정복했다. 이 둘이 한국바둑의 세계화를 이끈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둘은 한류(韓流)의 원조인 셈이다.
이제는 백발이 된 이 둘이 또 다시 만났다. 한국바둑 70년을 기리는 대국을 가진 것이다.
그 만남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단순한 바둑대국을 넘어 문화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