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땅에서 태어난 아기들에게 자동적으로 시민권을 주는 제도인 ‘자동 시민권’(birthright citizenship)을 둘러싼 논쟁으로 대선판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논쟁은 현재 공화당 주자들 간의 다툼 양상이지만 양당 후보가 결정되면 전체 대선전으로까지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자동 시민권을 없애야 한다고 가장 크게 목청을 높이고 있는 인물은 도널드 트럼프. 그러나 다른 공화후보 8명도 비슷한 주장을 펴며 폐지론에 동조하고 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자동 시민권 폐지를 반대하던 젭 부시 후보가 아시아인들의 원정출산을 비판하면서 논쟁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부시는 24일 텍사스 유세에서 “미국에서 태어난 아기들에게 시민권을 주는 제도를 아시아인들이 악용하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 그러자 자동 시민권 폐지를 가장 강력히 주장해 오던 트럼프는 “부시가 아시아인들을 모욕하고 있다”며 마치 자신이 자동 시민권자 옹호론자라도 되는 양 비난을 퍼붓고 나섰다.
자동 시민권을 둘러싼 공화당 주자들 간의 점입가경 싸움은 이 문제에 대해 후보들이 일관되고 정교한 입장을 갖고 있다기보다 이슈 몰이용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극우 표심을 자극해 도토리 키 재기 구도에서 우위를 선점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자동 시민권의 근거는 1868년 개정된 수정 헌법 14조이다. 이 수정헌법은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귀화한 모든 이는 미국 시민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연방대법원은 1894년 중국계 부모에게서 태어난 미국 출생자가 제기한 소송을 통해 수정헌법 14조의 내용을 재확인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동 시민권이 폐지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헌법을 바꾸려면 상하원에서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고, 전체 주 4분의 3 이상이 승인하거나 전체 주 3분의 2 이상 요구로 개헌협의회를 소집해 수정안을 만든 뒤 4분의 3 이상 주들이 승인해야 한다. 연방의회 구성과 민주 공화 지지주 분포로 볼 때 폐지론의 현실화는 상상하기 힘들다.
부시가 제기한 원정출산이 심각한 사회문제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적지 않은 미국인들이 이에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정서는 종종 자동 시민권 폐지론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원정출산 문제와 자동 시민권을 연결시키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다. 마치 극소수 웰페어 남용자들을 이유로 웰페어 제도 자체를 없애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부 외국 중산층 임산부들의 원정출산은 작은 문제이다. 이런 사람들을 이유로 자동 시민권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지 기관총으로 파리를 잡겠다는 것과 같은 발상”이라는 한 이민 변호사의 지적과 비유가 확 와 닿는다.
이런 지적이 아니더라도 자동 시민권 제도의 폐지는 미국의 국가정신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미국은 다양한 국가들로부터 온 이민자들 위에 세워진 나라이다. 자동 시민권 제도에는 이들을 모두 아우르겠다는 ‘평등’과 ‘포용’의 정신이 담겨 있다. 이런 정신이 있었기에 미국은 오늘날의 성장과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자동 시민권 제도가 어떤 경우에도 정쟁의 소재가 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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