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봉사의 길, 하나님이 내게주신 사역”
대학시절 장애아동 봉사하며 운동선수•체육교사 포기하고
사회사업가의 길로 접어들어...
대학 3학년부터 월드비전서 활동, 봉사하는 방법의 중요성 터득.
기독의료상조회 통해 의료보험 없는기독교인들 도와줄수 있어 감사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예수를 믿었다. 신앙의 출발이 모태에서부터 시작된 만큼 믿음의 분량도 훨씬 크다. 그는 목회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사회사업도 전공했다. 기독교적 신앙과 전공을 살려 신뢰와 배려, 희생과 봉사라는 소명의식으로 피땀 흘리며 살고 있다.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사랑실천인 것이다. 그는 바로 기독의료상조회 동부지부 위화조(47) 지부장이다.
■ 사회봉사는 평생의 사역
그는 1968년 서울 종로 효재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학교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교육자 집안에서 자란 모범생이자 우등생. 초, 중학교 시절 반장을 도맡아 했다. 전교 석차도 늘 1, 2등은 그의 몫이었다.
기독교 가정에서 모태 신앙으로 출발 튼실한 신앙생활도 했다. 그러던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아버지의 교육사업 실패로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다행히 좌절하지 않고 운동에 전념했다.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스포츠에도 만능이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핸드볼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서울올림픽 꿈나무로 선정될 정도였다. 1년 동안 태능 선수촌에서 생활했지만 국가대표와 인연을 맺지는 못했다. 그래서 체대로 진학했다. 운동선수가 아닌 체육교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역시 오래 가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 장애시설 봉사를 하면서 자신이 갈 길을 수정했다. 교사보다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명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체대를 포기했다. 이듬해 사회사업학과로 다시 진학했다.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보다 체계적인 봉사를 하고자 사회사업 석사공부도 했다. 그로인해 그가 평생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해결사로 생활하게 되는 계기가 된 셈이다.
그는 “장애시설 봉사를 하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사지가 멀쩡한 그 자체가 축복 받은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것이 나의 삶에서 사회봉사의 모태가 됐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사회봉사자의 길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평생 사역으로 여기며 열심히 걷고 있는 이유다”라고 말한다.
대학생 자원봉사단 결성
그는 대학 때 처음으로 경기도 광주의 장애시설에서 봉사를 했다. 그 곳에는 뇌성마비 등 죽음의 9부 능선에 놓인 장애 아동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복지시설에서 마저 포기한 아이들이었다. 일주일 동안 그들의 손발이 되어 함께 생활했다. 그리고 보다 많은 장애아동들을 돌보기 위해 대학생자원봉사자 모임을 결성했다. 이름은 발돋움의 옛말인 ‘사오리’였다. 처음엔 40여 명이 모였다. 그러다 서울과 경기일원에서 사회사업에 관심 있는 대학생 400여 명이 동참했다. 그 후 매달 장애아동 봉사를 했다. 서울올림픽 때는 장애아동들을 잠실종합운동장으로 데리고 가서 경기도 관전했다.
대학생 자원봉사단은 장애아동 봉사뿐만 아니라 세계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세계시민의식을 키우는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그는 1993년 10월 한국 월드비전이 ‘훼민 24’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한 ‘기아체험 24시간’ 행사에 대학생 400여 명을 인솔하여 참여했다. 대학생봉사단원들이 기아체험에 직접 참여함은 물론 행사참여 청소년들을 관리하는 봉사활동도 펼친 것이다.
■ 월드비전과 함께
그의 첫 직장은 월드비전 한국이었다. 대학교 3학년 2학기에 이미 직원으로 고용됐다. 대학을 다니면서 월드비전 활동을 한 것이다. 기독교적 배경과 사회사업을 전공한 그에게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일터였다. 그 곳에서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청소년들을 교육했다. 대기업 직원과 고급 공무원을 대상으로 사회봉사 교육도 했다. 그렇게 6년 동안 정열적인 사역을 펼쳤다. 그리고 잠시 월드비전을 떠나야 했다.
■ 미국 유학길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는 보다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1999년 가을 필라델피아의 페이스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2003년부터 다시 월드비전 미국의 동부한인책임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각종 재난재해 모금지원 캠페인을 펼쳤다. 한 아동 돕기 결연사업도 전개했다. 마음을 얻고 신뢰를 쌓기 위해 한인사회와 한인교회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동부지역에 거대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런 노력으로 2008년 월드비전을 떠날 때까지 한인 1만5,000여 월드비전 정기후원자를 확보하는 결실을 낳을 수 있었다.
그는 “한국과 미국에서 월드비전 활동을 하면서 물고기를 잡아주기 보다는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봉사 방식의 중요함을 터득하게 됐다. 그래서 사람들이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도와줄 수 있는 봉사자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을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고 귀띔한다.
■ 기독의료상조회와 인연을 맺고
그는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봉사보다는 생존의 삶을 살았다. 헌츠포인트 청과물도매시장에서 일을 한 것이다. 육체적 노동을 하면서 새로운 분야의 사람들을 만났다. 색다른 사회경험을 쌓은 것이다. 하지만 역시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법. 2013년 8월부터 의료비 나눔 사역을 펼치는 기독의료상조회와 동역하게 됐다. 의료보험이 없거나 의료비용이 너무 비싸 고통을 받고 있는 한인기독교인들을 돕기 위해 다시 나섰다. 동부지부장을 맡아 매주 교회들을 방문해 기독의료상조회의 의료비 플랜 설명회를 개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성실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좌우명을 실천함으로써 지난 2013년 8월부터 2015년 11월 까지 약 3,000여 가정의 5,000여 명 정도를 오바마케어 크리스찬 플랜에 가입 시키는 실적을 쌓고 있다.
그는 “기독의료상조회는 사람 돕는 일, 생명 살리는 일 그리고 한인사회 의료비용 절감 등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의료 혜택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음에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 베풀고 나누는 삶
그는 솔직하고 담백한 성격에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를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숨기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도 30분이면 쉽게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된다고 한다.
그는 대학 2학년 때 만난 동갑내기와 6년의 연애를 통해 결혼했다. 목사의 딸로서 참된 삶을 사는 모습에 반했기 때문이다. 그가 봉사자의 삶을 사는데 아내는 든든한 후원자다. 그래서 그에겐 매년 아내, 고등학교 다니는 두 딸과 가족여행을 약속하고 지키지 못하는 있는 것이 더욱 마음에 걸린다. 내년에는 꼭 가겠다고 다짐하는 이유다.
그에게 행복이란 남을 도와주면서 얻는 성취감이다. 한인사회에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그의 인생은 베풀고 나누는 삶 그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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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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