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남수, ‘무제’
골목은 늘 객관적이다
희망을 켜 놓은 듯 백열등 밝혀 둔 좁은 공간
의족을 수선실 바깥으로 길게 걸쳐놓았다
바닥까지 검정물 든 손을 탁,탁 치며, 이제 그만 해야죠
그만둬야죠,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초로의 사내
십수년인 듯 굵어진 손마디가 고집스럽다
피곤한 구두를 벗어 수선을 맡기는 저녁 무렵
내 구두는 이제 항해를 끝낸 폐선처럼 어둡다
좀처럼 광택이 살아나지 못할 거죽으로 찌그러져,
능동적이지 못한 내 성품을 비웃듯 손 빠른 사내
해진 일상을 기우고 봉긋한 광택을 생산한다
허리춤을 꾸욱 찌르고 견고한 실로 혈관을 심고
벌겋게 온몸을 지지고 닦아 환하게 빛을 복사해 낸다
속내를 보이진 않지만 손에 친친 광목을 감으며 말하겠지
자, 다시 한번 가면을 쓰고 살아 보세요
그래도 세상은 적당히 가리면 살만 하잖아요
구석에 앉아 왁스에 취해 밖을 바라본다
이 거리에서 오래오래 부대끼며 살아온 나
그만 둬야지, 이제 정말 쉬어야지 하면서도
끝내 꽃피우고 싶은 무화과나무 척박한 거리 모퉁이
천천히 아주 객관적으로 어두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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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끝없는 수선의 연속이다. 크고 작은 아픔이 우리를 쓰러뜨릴 때마다 달래고 매만져 다시 일어나 걸어 나가는 것이 산다는 일이다. ‘이제 그만 둬야죠’라고 입버릇처럼 한탄을 하면서도, 날래고 능숙하게 헤진 구두를 반짝반짝 고쳐 놓는 이처럼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스스로를 고치고 매만져 우리 또한 날마다 내일을 열어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수선된 구두처럼 반짝이는 가면이란 다름 아니라 생을 이끄는 희망인 것이겠다.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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