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할로윈을 맞아 직장에서 코스튬 콘테스트가 있었다. 이에 참여한 한 직원이 일본 스모 선수 코스튬을 입고 뒤뚱거리는 몸짓으로 사무실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는데, 때마침 나는 곁에 있던 일본인 동료의 안색이 2, 3초쯤 굳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스모는 일본 고유의 전통적인 격투기 중 하나로, 예전부터 힘센 남자들이 신 앞에서 그 힘을 바치는 신토 의식으로 치뤄져 일본인들에게는 신성하게 여겨지는 민족유산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일본인이 아닌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무지막지하게 뚱뚱한 남자들이 거의 알몸으로 벌이는, 좀 우스꽝스런 경기로 보일 수도 있겠다.
내가 일하는 직장은 전 세계 100개국 이상에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는 클럽들을 관장하는 세계본부이다. 따라서 이곳에는 그 어느 직장보다 다양한 국가 출신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고유업무 이외에도 세계본부 차원에서 벌이는 캠페인이나 이니셔티브에 대해 그것이 자신의 나라에서 별 무리없이 받아들여질지를 조언하는, 일종의 문화 자문역할까지 겸하게 된다.
처음 이 직장에 들어왔을 때 나는 일본계 동료들하고 많이 친하게 지냈다. 한인이라면 당연히 일본계에 대해 갖고 있을 반감이나 경계심에 앞서 미국 내에서 ‘아시안’으로 함께 분류되는 데 대한 동류의식이 더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 미국에 사는 한인에게는 한국의 한국인에 비해 일본인에 대해 갖는 감정이 조금 더 복잡하다. 30여년 전, 내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은 ‘코리안 워’ 정도였고, 동양이라고 하면 중국이나 일본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많은 미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동경과 환상은 놀라울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싫든 좋든 일본 덕분에 미국 내 아시아인에 대한 이미지가 향상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내가 그들하고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미국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일찍부터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오래 동안 살았고 말과 행동이 미국인 중에서도 소위 말하는 ‘리버럴’에 가까웠다. 본인은 동성애자가 아니면서 게이 퍼레이드에 응원 차 나갔던 동료도 있고, 버니 샌더스를 열렬하게 지지했던 또 다른 동료는 ‘트럼프 탄핵’을 입에 달고 살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이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어떨 수 없이 일본인 DNA라 표현할 수밖에 없는 특징들이 드러나 나를 당혹시키기도 했다. 내가 본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명령에 대한 절대 복종’인데, 나는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들과 함께 일하면서 이들이 업무와 관련해 불만을 겉으로 드러낸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상사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디테일에 강한 이들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핏속에 흐르는 민족적 특징을 떠올리게 된다.
이럴 때면 나 역시 한국인 DNA가 발동해 “역시 일본인들이란…” 하는 소리가 안에서 올라오지만, 얼른 생각을 바꾸곤 한다. 이는 내가 미국에 살면서 지키려고 노력하는 한 가지 원칙 때문인데, 그것은 몇몇 개인의 언행을 특정집단으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세상에 완벽히 장점만 갖춘 민족이나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에는 여러 요소가 작용을 하는데 미국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특정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태도가 하나 더 작용을 한다. 하지만 개인의 책임을 그가 속한 집단에 묻지 않는 것, 그리고 세상에 더 우월하거나 열등한 문화는 없다는 인식은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국민적 합의이고 상식이다(이것이 요즘 좀 흔들리는 것 같아 불안하기는 하다). 다문화 사회에 익숙하지 않았던 한인들도 이 상식만 염두에 둔다면 미국에서의 삶이 훨씬 풍요롭고 살 만해 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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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민 / 국제 로타리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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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직장 좁은 사무실 에서 일본인 2세 3세와 10년 이상 일 하면서 한번도 충돌이나 얼굴 붉히는 일이 없었다. 같은 한국인 끼리는 등 위에서 여러번 씹히는 일이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