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기착지인 소도시에 도착했다. 고속도로 나들목을 빠져 나오자 마자 ‘본즈’ 수퍼마켓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강렬한 빨간색의 굵고 간결한 글씨체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든다.
샌디에고 출장에서 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하는 현지 회사의 직원으로 처음 만난 남편은 멀리 와서 일만 하던 나에게 가까운 친구가 되어 주었다. 차가 없던 나와 점심을 같이 먹으러 다녀 주고, 야근 후 밤 늦게까지 일하고 지친 나에게 맥주와 안주거리가 담긴 ‘본즈’ 봉지를 내밀기도 했다. 그 덕분에 장기 출장을 견딜 수 있었고, 그와 결혼을 해 샌디에고에 처음 정착을 하였다. 오전에는 학교에 가서 영어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저녁 메뉴 레시피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다. 낯선 이국에 떨어져 주부로서 첫 발자국을 뗐던 나는,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이 ‘본즈’에 들락거렸다. 초보 요리사에겐 레시피의 한 줄 한 줄, 재료 하나 하나가 너무나도 소중했기 때문에 재료 하나라도 없으면 당장 ‘본즈’로 달려가 사와야 했다.
전에는 저녁에 야근 혹은 회식을 하거나 친구들을 만나는 등 바빴지만, 친구도 없고 일도 그만두고 온 적적한 이곳에서 나는 ‘본즈’와 함께 야심차게 살림의 여왕을 꿈꾸었다. 오전에 학교가 끝나면 매일 장을 보러 ‘본즈’에 갔고, 매일 저녁 남편과 또 ‘본즈’를 둘러보러 갔다. ‘본즈’를 구경하는 것이 취미 생활이였고 살림에 필요한 소소한 것들을 사면서 뭔지 모르게 허전했던 나의 마음을 달랬다. 그러다보니 두 식구만 먹고 사는 나의 주방에는 온갖 시즈닝들이 즐비했는데 다 ‘본즈’ 출신이었다.
그렇게 ‘본즈’는 알아주지도 않는 단골 행세를 하다가 이사를 온 북가주에는 ‘본즈’가 없었고 우습게도 난 한동안 ‘본즈’ 금단 현상을 겪었다. 더 저렴하고 많은 물건을 갖춘 마트도 많건만, ‘본즈’는 학창시절 늘 가던 떡볶이 집이나 직장을 다니면서 자주 가던 중국집 같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정겨움이 있다.
그 시절 나는 매일 빨간 글씨가 인쇄된 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던 외로운 살림의 여왕 지망생이였다. 그리고 ‘본즈’는 엄마가 꾸리시던 따뜻한 집에 살다가 멀리서 혼자 살림을 시작한 어리숙했던 내가 정말 많이 의지했던 무생물의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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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섬유조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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