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예보에서 들은 것보다도 훨씬 더 매서운 추위가 며칠째 계속되었다. 세상은 꽁꽁 얼어붙어 버렸고,밤사이 투명한 얼음 옷으로 갈아입은 나무들이 짧은 햇살에 눈치없이 반짝인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뭇가지들이 찢어지는 둔탁한 소리와 언 땅을 할퀴고 지나가는 제설차량의 날카로운 금속소리가 불협화음을 내며 동토의 하늘을 맴돌다 흩어졌다. 두꺼운 외투와 목도리를 꺼내 들었다가 아내의 만류에 포기했다.어차피 사람의 왕래가 없으니 이런 날은 몇 시간 늦게 일을 시작해도 좋을 것이었다.
TV에서는 빙벽으로 변해버린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여주며 이번 한파의 위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지난겨울에 아내와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을 때의 일들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폭포에서 떨어져 나온 물방울이 만든 얼음 동굴과 눈부신 얼음 꽃들을 보며 상상 너머의 풍경에 감탄사만 쏟아 냈었다. 시린 손을 비벼가며 호수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와 언 강 위로 쏟아지던 햇살을 사진에 담느라 뛰어다니다 넘어졌던 기억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얼음으로 뒤덮인 길 위를 위태롭게 걸어가면서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가 건너온 시간이 오버랩되어 마음이 애틋해졌다. 지나온 삶의 궤적을 거창하게 발가벗겨 꺼내놓지 않더라도,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대자연 앞에서 한번쯤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철새들이 한 계절을 머문다는 호숫가에 차를 세우고 강 아래쪽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강은 얼어 있었고 발부리에 걸리는 땅은 오래 전에 상흔으로 남아있는 무쇠에 대한 기억처럼 단단하고 차가웠다.
매운바람이 두터운 외투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렇게 얼어붙은 강을 고향으로 둔 철새의 운명이 왠지 안쓰러워지려는 순간, 수백 마리의 철새들이 언 강물 위를 무리지어 날아갔다. 강은 얼었으나 겨울이 아닌 곳에서, 견디며 건너가는 새들의 자유로움을 본 날이었다.
창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그 위로 다시 눈이 쌓였다. 어둠 위로 어둠이 쌓이듯 눈도 어둠처럼 밤새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었다. 내가 창가에 서서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아내가 식탁에 상을 차려 놓고 불렀다. 어머니 기일에 올렸던 동태전과 당신이 제일 좋아 하시던 녹두 빈대떡, 그리고 따뜻한 정종이 하얀 도자기 주전자에 담겨져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어머니 식성을 꼭 닮은 나이든 아들이 목젖을 꾹꾹 눌러가며 어머니 대신 녹두 빈대떡을 먹었다. 길이 없는 곳에서도 길을 보게 했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들을 수 있게 했던 분, 그래서 주저앉을 때마다 말없이 잡아주던 따뜻한 손길에 얼마나 위로를 받았었는지 이제야 고백한다.
어쩌면 그리움은 말이나 글로 표현되지 않는 몇가지 감정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백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암각화처럼 누군가를 마음에 담아두고 그리워하는 것은 추운 겨울을 홀로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오늘처럼 추운 날에도 철새들은 강 저편에 두고 온 그리움을 향해 강 위를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을 것이다. 삶을 혼돈으로 몰고 가던 젊은 날의 그 숱한 감정들을 강 건너에 두고도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게 했던 내 그리움의 원천에도 감사한다. 다행히 오늘도 생의 순환이 있어 견딜 만 했다.
잠시 숨을 고르며 걸림 없는 하늘을 본다. 당연하게 누리던 햇살의 소중함을 비로소 깨닫는다. 마을을 걷다 우연히 바라본 이웃집의 창에 하얗게 김이 서려 있다. 그 안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가족들이 모여 사는 공간에서 모처럼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가 창을 넘는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평범한 날, 느리게 겨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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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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