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록키산맥의 웅장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병풍처럼 빙 돌아가며 눈앞에 바짝 다가온 거창한 바위산들의 기세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한 번 스쳐 가는 경관이 아니고 몇 시간을 달려도 바위산의 위풍이 곳곳에 펼쳐진다. 광주 무등산의 유유한 부드러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나는 평생 처음 대하는 거대한 바위산의 거친 야성적인 날카로움에 숨을 죽여가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였다. 그 규모에 압도되어 동행한 사람들과도 서로 감동의 눈빛만 맞출 뿐 마땅히 표현할 단어를 찾아낼 수가 없다.
구름 속의 호수라고 불리는 세 개의 호수가 캐나다의 알프스라 할 수 있는 도시 벤프(Banff) 인근에 있다. 루이스(Louise), 미러(Mirror), 아그네스(Agnes) 호수를 말한다. 빙하의 물이 녹아 호수를 이루고 있는 루이스 호수에서 1시간 정도 오르면 미러 호수가 있고 그곳에서 30여 분을 더 오르면 아그네스 호수가 있다. 아그네스 호수는 해발 칠천 피트에 위치해 있는데 호수 옆에 아담하고 그림 같은 찻집(Tea House)이 있다.
이 찻집은 1901년에 산행자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곳에서 만나는 한 잔의 차를 즐기기 위해 희망을 갖고 힘든 산행을 한다. 루이스 호수에서 아그네스 호수에 이르는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르막길이다. 한 발 한 발 떼어놓는 발자국에 무거운 체중이 실려 주저앉고 싶지만, 산상에서 맛볼 수 있는 그윽한 향이 스민 한 잔의 차에 대한 기대가 꾸준한 산행을 이끈다. 그 찻집엔 전기시설이나 샘물이 없어서 호수의 물을 끓여 차를 끓이고 디저트를 만든다는 사실에 더한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산행으로 가빠진 숨결과 일상에서 지고 온 마음의 무거운 짐을 벗어 놓고 빙하의 혼이 담긴 차를 맛본다는 막연한 호기심이 대단하다.
땀 흘리며 호수에 오르는 길에서 또 다른 작은 세상을 보게 된다. 휘어진 길목마다 쉼터를 만들어 록키의 숨겨진 모습을 바라보는 경이로움도 있지만 앞뒤로 지나치는 사람들의 영어가 아닌 생소한 언어의 흐름 속에서 느껴지는 친근감이 있다. 어느 곳에서든 지 외국어가 들리면 세상은 하나라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편안해진다. 왠지 서로 이방인끼리 느끼는 동질감일 것이다.
때아닌 6월에 내리는 생전 처음 본다는 눈발을 손바닥에 담으려는 홍콩 부부가 있는가 하면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손자의 도움을 받으며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인도 할아버지가 있다. 아그네스 찻집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재활용품을 하루에 서너 차례 배낭에 넣어 나른다는 젊은 청년도 있다. 록키의 절경에 넋을 잃고 찬사하다가 웃옷을 벤치에 남겨두고 온 남편에게 달려와 재킷을 안겨주던 아름다운 두 아가씨. 얼마 후 아가씨의 뒤 주머니에서 떨어져 나온 핸드폰을 잃고도 그 사실을 모르고 한참을 가던 아가씨에게 핸드폰을 주워 돌려준 우리. 서로의 마음 씀에 큰 웃음을 함께 나누었던 초면의 사람들.
이렇듯 각자의 사연을 담고 숨찬 언덕길을 오르면 보상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 초록빛 호수와 찻집이 있다. 100여 가지의 차와 디저트를 맛보이는 찻집은 그리 넓지 않아 다른 그룹과 자리를 같이해야 하는 데 전혀 불편하지가 않고 낯설지가 않다. 자리싸움도 없고 조급함도 없으며 모두가 한 맘 되어 록키의 아름다움에 푹 젖어 든다. 작은 세상 넘나들며 따스한 정이 펼쳐지는 아그네스 찻집이 주는 평화이며 자연의 가르침이다.
세상 모든 일이 이번 산행처럼 노력하고 나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멋진 대가가 보장된다면 세상은 그런대로 살 만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아그네스 찻집에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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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레지나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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