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옆집 친구 집에서 TV를 보다가 영화배우 박노식씨와 아들 박준규씨가 함께 나오는 선전을 보았는데 그 선전에 나오는 카피라이터 문구가 머리에 잊어지지 않는다.
“개구쟁이라고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아버지 박노식 씨는 작고했지만 아들 박준규씨는 아버지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할 지라도(?) 나름대로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다. 비록 광고라 할지라도 그 아버지의 말을 마음에 새겨 두었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나는 25살에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이민을 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나보다는 공부를 잘하셔서 행정고시에 합격하셨고, 교편생활을 하셨다.
직업때문이지는 않지만 아버지는 너무 철두철미하셔서 잘못된 것과 올바른 것을 구분하셨다. 혹시라도 잘못이라도 하면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무서워했고 나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 아버지가 미국에 오실 때 나이가 60살이셨다.
그 당시 나는 아버지의 그 때 나이는 모든 것을 접고 이제 인생의 마지막을 보낼 때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미국에 온 그 다음해에 신학교에 입학하셨다.
무슨 뜻으로 그런 진로를 결정하셨는지 몰랐기에 나로서는 많이 놀랐다.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나이에 무엇을 또 하시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동안 아버지에 가졌던 반감이 아버지에 대한 반대감정으로 터졌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목사가 되고 목회를 25년 정도하게 되니 그렇게 싫어하고 멀리하고 싶었던 아버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때 아버지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왜 그 때 아버지를 더욱 더 도와드리지 못했을까?
60살이었던 아버지의 나이의 이정표에 나도 도착하고 나니 그 때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인생은 살아 있는 한 무엇인가 끊임없이 해야 하고, 또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젊은 사람처럼 똑같이 먹고 싶고, 가고 싶고, 입고 싶고, 즐기고 싶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주 말씀도 안하시고, 표현도 안하시고, 또 따뜻한 말 한마디 안하시던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표현력이 많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세상이 화평해야 하고, 공평과 정직으로 모두가 다 잘 사는 그런 사회, 교회,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인생의 좌우명을 갖게 되었다.
강한 것은 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90세를 살면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려고 노력하셨다.
철 모르는 아들을 말없이 사랑하셨던 아버지! 나의 아버지! 나도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늦으나마 고백합니다.
“아버지! 부족하고 철모르는 아이지만 튼튼하게 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안효광 목사 마하나임 교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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