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내가 살고 있는 오래된 대 단지 아파트가 더러는 이 고장에서 꽤나 유명한 내 집 마련의 첫 주거지로 꼽힌다. 단지마다 여유로운 공간에 지어진 저층 건물은 승강기의 도움 없이도 계단으로 쉽게 걸어서 올라 갈수 있을뿐더러 젊은 세대들에게는 경제적으로도 편리한 내부구조를 갖추고 있다. 갓 이민을 왔다거나 타지에서 이사와 단기간 머물기에도 적격인 이 아파트는 카운티 중심 대로변에 수 많은 상가들을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고 오밀조밀한 단지가 넓게 퍼져 있어 우선 시야가 탁 트여 시원하다.
이곳에서 한 해를 보내는 동안 다양한 피부색과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과 수시로 마주치다 보면 마치 인종 박물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본의 아니게 흥미로운 관찰력도 발동한다. 몸짓 손짓 정열적인 중남미 사람을 비롯하여 무언가 비밀스런 인도인, 무뚝뚝한 중국인, 미소 뒤에 숨은 냉랭한 모습의 백인, 어딘가 꺼벙하고 어설픈 표정의 흑인, 그 중에서도 동양적인 아일랜드 아줌마의 아침 인사 “해브 어 원더풀 데이”가 기분 좋은 하루를 열어준다
이곳의 주말 풍경은 볼거리가 많다. 금요일 저녁이면 여기 저기서 소시지와 생고기를 굽는 바비큐그릴을 둘러싸고 이웃들과 어울려 일주일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입으로 푸는 라티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재미도 있다. 흑인 청소년들은 카셋트를 크게 틀어 놓고 뛰고, 춤추고, 공 놀이 할 때는 예의라고는 찾아 볼 수 없지만 때로는 다정다감한 면도 엿보인다. 우리 아래 층에는 아빠가 두 남매를 키우고 사는 젊은 흑인 가장이다. 언젠가 그날 따라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식료품이 많아서 우리 부부가 낑낑거리며 차에서 물건을 내리는 모습을 이 집 아이가 언제 보았는지 맨발로 이층에서 뛰어 내려와 “도와 드릴까요?” 하며 삼층까지 무거운 짐을 올려다 주었다. 그런 일이 몇 번 있고 보니 외양으로 느끼는 부정적인 생각을 행동으로 말끔히 씻어 보여준 이웃이 있어 감동을 받고 있는 중이다. 더욱이 우리 옆집 역시 대학생을 둔 중년의 흑인 아주머니는 싱글 맘으로 미끈한 몸매에 교양이 몸에 배어있는 듯 눈이 마주치면 상냥한 미소 속에 친밀감이 묻어 나온다.
여름이 되면 물 만난 고기처럼 인도인들은 그들 고유의 전통 복장을 하고 삼삼오오 잔디 위에 모여 앉아 반상회를 연다. 단합이라면 이들을 당할 재간이 없다. 그들은 사람을 끌고 다니는지 한 집이 이사 오면 몇 년 지나면 그 지역은 작은 인도 마을로 돌변한다. 시끌벅적한 라티노 젊은이들도 중남미 특유의 말투와 제스처는 물론, 모였다 하면 남의 이목은 아랑곳 없이 그들만의 세상을 노래하며 즐긴다. 대개 개인적인 사생활을 소중히 여기는 듯한 한국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타인종에 비해 외로워 보이는 것은 적은 숫자 탓인가, 아니면 개인 취향 탓인가.
사슴이 뛰노는 고목이 들어 찬 수풀림, 늘 푸른 넓은 잔디밭, 잘 정돈된 보도, 그리고 오래되었으나 여유롭게 배치된 나즈막한 작은 단지들, 수시로 잔디가 자라기 바쁘게 다듬고 손질하니 그 많은 개 배설물 때문에 미간을 찌푸릴 일도 없다.
얼마 전 외출하고 돌아오다 차창 너머로 낯선 한 장면을 목격했다. 분쟁 지역인 시리아나 아프가니스탄 출신으로 보이는 중동의 젊은 여인들이 검은 차도르를 두르고 무거운 이민 가방을 끌다시피 하고 아파트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인종문제, 이민문제로 갈등을 겪는 작금의 미국사회지만 땅이 넓은 미대륙이라 이민자들의 손길이 언제든지 필요한 것을 어찌하리요.
화살처럼 지나가는 세월 속에 한번쯤은 활기찬 젊은 세대들과 이웃하며 어우러져 살아 보는 것도 이 또한 먼 훗날 한 순간의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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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순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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