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앙고등학교 문예반원으로 계원순보를 제작하고 있을 1950년대 후반 김열규 선생님으로부터 효자동 허영숙 여사를 만나 그의 아드님 이영근 선배의 편지와 콜럼비아 대학 성적표롤 받아와 계원순보에 기사를 쓰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영근 선배님은 중앙학교 출신으로 50년대 후반 콜럼비아 대학에서 박사과정의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 보다도 춘원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이 나를 들뜨게 했다. 효자동 진명여고 정문 바로 길 건너에 허영숙 여사가 개업의로 일하고 계셨다. 그렇게 나와 이영근 선배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와 all A 성적표를 받아와 쓴 자랑스러운 선배에 관한 기사,그 기사가 실린 계원순보를 들고 다시 허영숙 여사를 찾아갔을 때 어머니의 아들 사랑을 가감없이 느낄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내가 마흔이 되던 해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실에서 환경정책보좌관으로 일할 적에 워싱턴 지역 중앙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에서 처음 이영근 선배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이 선배님과의 만남이었다.고등학교 문예반 시절 알게 된 이 선배님은 볼티모어 존스 홉킨스 대학 물리학과 중진 교수로 가르치고 계셨다.한두 번 전화로 안부를 물었던 기억이 전부이니 그의 부음을 받고 내가 후배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죄송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러나 이영근 선배가 중앙학교에서 해방을 맞이하던 해 친일파의 아들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내 아버지는 친일파가 아니다”라는 혈서를 쓴 일화를 나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가 중앙학교의 학적부에 국어국문학자 이희승 선배(3회)와 함께 최고의 성적을 기록한 최우수 졸업생이라는 사실이 5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화석처럼 박혀 있다.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불운한 한국 대문호의 아들로 태어난 이영근의 비애와 눈물을 나는 10여년 후배로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나는 춘원의 둘째 따님 이정화 박사를 미국 아세아 학회에서 처음 만나 그 분이 쓴 ‘그리운 아버님 춘원’을 읽고 춘원을 용서하게 되었다.친일파의 뜻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춘원은 조선인을 위해 친일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그가 친일 해서 일본정부로부터 일신상의 명예로운 대접이나 경제적인 대접을 받은 것이 없다. 그의 가족은 가난하게 살아야 했고 아이들의 감기약도 구할 수 없는 처지에서 식민지시대 말년을 보냈다.춘원을 아는 피천득 선생이나 김형석 선생, 도산 안창호, 우남 이승만, 김구 선생도 춘원을 아끼는 인물이었다
이영근 선배의 중앙학교 동기생 한 분이 이 도시에 살고 계시는데 그 오재근 선배가 가끔 자하문 친구 집에 가서 그의 아버지 춘원을 대한 적이 있어서 그 분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춘원의 인상을 물었더니 “한번도 큰 소리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언제나 조용조용하게 귀엣말로 말씀해 주셨다”고 회고했다 춘원이 친일을 했다고 한번도 생각한 적 없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시면서 춘원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친일파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내가 알고 있는 이영근 선배는 역사가 춘원을 객관적으로 심판할 때가 오리라고 전망하며 아들로서 춘원을 옹호하거나 변호할 마음이 없다고 말했다 이 선배의 따님 앤이 춘원의 첫 현대 장편 소설 무정을 영역해 미국에서 출판했으니 아들된 도리를 그렇게 다했는지 모른다. 그는 북한 당국이 춘원의 무덤을 국가유공자 묘지에 조성했다고 해서 아버지 묘지를 참배하고 왔다.그는 아버지 묘지를 다녀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국 현대문학사의 큰 획을 긋고 간 비운의 천재가 한국전쟁 초기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갔고 거기 어디서 죽어갔고 그 아들은 조국에서 멀고 먼 미국 볼티모어 객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우리는 모두 그 불행한 한국역사의 증인이 되었다.
이영근 선배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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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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